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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부터 인정 ‘0건’…급발진 불안 사회 [뉴스+]

#사례 1. 지난 4월 17일 오후 1시 10분쯤 함안군 칠원읍 한 교차로에서 A씨가 몰던 투싼 SUV(스포츠유틸리티차)가 앞에 있던 승용차와 추돌했다. 이후 이 차량은 약 1.3㎞를 질주하다 칠서나들목(IC) 인근 지방도 교통 표지판을 충격한 뒤 주변 논에 전복됐다. 국과수 감정 결과 교통표지판과 충돌하던 당시 차량 속도는 시속 약 165㎞로 파악됐다. A씨는 “당시 브레이크 페달을 밟았으나 작동하지 않았다”는 취지로 경찰에 진술하며 차량 급발진 사고라고 주장했다.

 

#사례 2. 12일 오전 10시 20분쯤 서울 동작구 남성사계시장에서 B씨가 운전하던 승용차가 가게로 돌진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경찰과 소방당국에 따르면 좁은 시장 골목을 주행하던 차량이 갑작스럽게 속도를 내면서 횟집으로 돌진했다. 운전자는 경찰 조사에서 차량이 급발진했다고 주장했다. 운전자가 술을 마시거나 마약을 한 정황은 없었다. 경찰은 급발진 여부 감정을 위해 사고 차량을 국립과학수사연구원으로 인계했다.

지난 4월 17일 오후 1시 10분쯤 경남 함안군 칠원읍 한 교차로에서 운전자 A씨가 몰던 투싼 SUV(스포츠유틸리티차)가 시속 약 165㎞로 질주하다 전복된 모습. A씨는 차량 급발진 사고를 주장해왔다. 연합뉴스

A씨와 B씨처럼 급발진으로 인한 차량 사고 주장이 잇따라 제기되고 있다. 하지만 국내에서 차량 결함에 따른 급발진이 인정돼 제조사의 민·형사상 책임이 확정된 경우는 현재까지 없다.

 

14일 대법원 인터넷 판결서 열람 시스템에 따르면 급발진 주장 사고에서 차량 결함을 명시적으로 인정한 대법원 또는 하급심 확정판결은 단 한건도 없다.

 

수사기관이나 단속기관에서도 기계 결함으로 인한 급발진이 인정된 적은 없다. 교통안전공단에 따르면 2017년부터 올해 6월까지 총 236건의 급발진 사고가 신고됐다. 실제 급발진으로 판정된 사례는 전무하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에서도 최근 5년간 급발진 의심 사고 364건을 감정했지만, 급발진으로 결론 내린 사례는 없었다.

 

운전자의 과실 여부를 판단하는 형사 재판에서도 기소된 운전자가 급발진을 이유로 무죄를 선고받은 사례는 없다.

지난 1일 서울 중구 시청역 교차로에 대형 교통사고가 발생해 출동한 119구급대와 경찰 등이 사고 현장을 수습하고 있다. 뉴시스

운전자의 급발진 주장은 모두 거짓인가.

 

현실적으로 급발진 판단이 쉽지 않다. 운전자의 증언만으로 그 원인이 페달 오인인지, 차체의 기계적 결함인지 여부를 규명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제조사들은 급발진으로 의심되는 사고에 대해 ‘불명의 원인으로 가속 페달이 눌린 것’이라고 주장해 왔다. 하지만 페달 블랙박스가 설치된 차량이 거의 없어 이 주장을 논파하기 어려웠다.

 

이에 페달 블랙박스 의무화로 급발진 사고 책임 소재를 확실히 하거나, 페달 오인 사고 방지를 위한 안전장치를 도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한편 정부는 계속되는 급발진 사고 원인을 규명하기 위한 ‘가속페달 블랙박스’ 도입을 활성화한다.

지난 12일 서울 동작구 한 시장에서 횟집으로 돌진한 차량. 해당 운전자는 차량 급발진을 주장했다. 연합뉴스

완성차 업계에 따르면 국토교통부는 조만간 국내외 완성차 제조사에 출고 시 페달 블랙박스 장착을 재차 권고할 계획이다. 페달 블랙박스란 액셀, 브레이크 등 운전석 하단의 페달을 녹화하는 블랙박스다.

 

국내에서 아직 급발진이 인정된 사례가 없는 만큼 페달 블랙박스 영상은 운전자가 액셀을 밟지 않았다는 중요한 증거자료로 활용될 수 있다.

 

다만, 국토부는 페달 블랙박스 설치를 의무화하지는 않기로 했다. 자동차 가격 인상 요인이 될 수 있고, 수입차에 이 같은 규제 적용 시 통상 마찰로 이어질 수 있는 등 각종 부작용을 감안한 데 따른 것이다.

 

정치권에서도 페달 블랙박스 장착을 의무화하는 방안이 추진 중이다.

 

이헌승 국민의힘 의원은 자동차 제작·판매자가 의무적으로 신차에 페달 블랙박스를 설치하도록 하는 것을 골자로 한 자동차관리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이를 위반할 경우 3년 이하 징역 또는 3000만원 이하 벌금에 처하도록 하는 내용이 담겼다.


김기환 기자 kkh@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