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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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헌절을 다시 공휴일로!” [김태훈의 의미 또는 재미]

‘유엔의 날’ 또는 ‘유엔절’로 불린 국제연합일이 법정공휴일이던 시절이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인 1945년 10월 유엔이 창설된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유엔 회원국도 아닌 한국이 1950년부터 매년 10월24일을 국제연합일로 지정해 기린 데에는 6·25전쟁이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 개전 초반 북한군의 기습남침에 맥을 못 추고 연전연패를 거듭하다가 미군 등 유엔군 참전에 힘입어 가까스로 기사회생할 수 있었으니 이 얼마나 고마운 존재인가. 그런데 1975년까지 쉬는 날이었던 국제연합일은 이듬해인 1976년 공휴일 아닌 그냥 기념일로 격하됐다. 북한이 유엔 산하 국제기구에 정식 회원국으로 가입한 것이 계기로 작용했다.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는 한국’이라던 유엔의 원칙이 사실상 무너진 데 따른 항의 표시로 풀이된다.

 

지난해 7월 서울 여의도 국회 본청에 제75주년 제헌절을 알리는 초대형 현수막이 내걸리고 있다. 연합뉴스

국제연합일을 대신해 법정공휴일이 된 것이 바로 ‘국군의 날’이다. 1956년 이승만정부는 6·25전쟁 도중인 1950년 10월1일 우리 군이 38선을 넘어 북진을 개시한 것을 기리고자 매년 10월1일을 국군의 날로 지정한 바 있다. 그런데 1976년 공휴일로 승격한 국군의 날은 겨우 15년 만인 1991년 달력의 이른바 ‘빨간 날’에서 제외됐다. 당시 노태우정부는 “기업의 생산성 향상을 위해서”라고 이유를 설명했다. 10월3일이 법정공휴일인 개천절이고 그 즈음에 추석(음력 8월15일) 연휴가 도래하기도 하는데, 10월1일까지 쉬어 버리면 나라 경제에 악영향을 끼치고 근로자들의 근무기강도 해이해진다는 뜻이 담겨 있다. 나라 위해 싸우다 목숨 바친 군인들을 기리는 현충일이 있으니 굳이 국군의 날까지 공휴일로 해야 하느냐는 지적도 한몫 했을 것이다.

 

1991년 국군의 날과 똑같은 논리로 법정공휴일에서 해제된 국경일이 있다. 바로 한글날(10월9일)이다. 1446년 세종대왕이 새 문자 한글을 반포한 것을 기념하고자 일제강점기인 1926년 조선어연구회(현 한글학회) 회원들이 주도해 만들었다. 처음에는 ‘가갸날’이라고 불렀다가 1928년 한글날로 개칭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듬해인 1949년부터 매년 한글날에 온 국민이 쉬었으나, 앞서 소개한 대로 1991년 국군의 날과 더불어 공휴일에서 배제됐다. 이후 국어학자 등 학계와 문화계 인사들을 중심으로 ‘한글날을 공휴일로 재지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봇물을 이뤘다. 한류가 확산하고 ‘한글이 세계 최고의 우수한 문자’라는 인식이 널리 퍼지며 정부도 마음을 돌렸다. 2013년 한글날은 22년 만에 법정공휴일 지위를 되찾았다.

 

1948년 5월31일 신생 대한민국의 헌법 제정을 위해 소집된 제헌국회 개원식에서 이승만 당시 국회의장(왼쪽 상단)이 개회사를 하고 있다. 뉴시스

제76주년 제헌절을 이틀 앞둔 15일 ‘제헌절을 다시 법정공휴일로 지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확산하고 있다. 1948년 7월17일 대한민국 헌법이 공포된 것을 기리는 제헌절은 1950년부터 반세기 넘게 공휴일이다가 2007년 제외됐다. 주 5일 근무제 시행으로 토요일에 쉬게 되자 ‘휴일을 줄여야 한다’는 경제계의 주장이 힘을 받은 게 근본 원인이었다. 국민의힘 나경원 의원은 이날 제헌절의 공휴일 재지정을 핵심으로 하는 법률 개정안을 발의하며 “자유민주주의를 기반으로 한 대한민국 헌법의 제정과 공포의 의미를 기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요즘 거대 야당이 헌법상 입법권과 탄핵소추권 등 국회 권한을 남용하는 것을 보며 ‘헌법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는 안타까움을 지울 길 없다. 당장 ‘국회의원은 국가 이익을 우선하여 양심에 따라 직무를 행한다’고 규정한 헌법 46조 2항을 제대로 실천하려는 야당 의원이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헌법 공부 확산의 계기가 될 수만 있다면 제헌절을 공휴일로 삼아도 무방할 것이다.


김태훈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