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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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대전 때 숨진 18세 미군, 82년 만에 고향에서 영면

캘리포니아 출신 찰스 파워스 일병
1942년 일본군 포로 붙잡혔다 사망
종전 후 70년 넘게 ‘실종자’로 분류
2023년 5월 DNA 검사로 신원 확인

제2차 세계대전 도중 일본군에 포로로 붙잡혔다가 숨진 미군 참전용사가 꼭 82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가 영면에 들었다.

 

17일(현지시간) AP 통신에 따르면 미 육군항공대(현 공군) 소속 찰스 파워스 일병의 유해가 전날 캘리포니아주(州) 로스앤젤레스로 운구돼 인근 리버사이드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사망 당시 고작 18세였던 파워스는 오랫동안 실종자 명단에 있었다. 미 국방부 전쟁포로·실종자 확인국(DPAA)은 2차대전 당시 일본군이 필리핀에 설치한 포로수용소에서 수습된 신원미상의 미군 유해들을 대상으로 유전자(DNA) 검사를 했고, 2023년 5월 마침내 파워스 일병의 신원이 확인됐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 육군항공대 소속으로 일본군과 싸우다가 포로로 잡힌 뒤 숨진 찰스 파워스(당시 18세) 일병. 오른쪽 사진은 입대 후 군복을 입은 모습. 미 국방부 제공

고인에 관해선 알려진 것이 많지 않다. 캘리포니아 출신으로 육군항공대에 입대해 2차대전 당시 필리핀 내 미군 항공기지에서 복무했다는 것이 전부다. 1941년 12월 하와이 진주만 공습을 시작으로 미국과 전쟁에 돌입한 일본은 미국이 지배하던 필리핀에도 상륙했다.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이끄는 미군 병력은 중과부적이었다. 급기야 미군은 수도 마닐라를 포기한 채 마닐라만(灣) 바타안 반도로 철수해 버티기에 들어갔다. 하지만 일본군의 공세는 더욱 거세졌고 필리핀 내 미군은 1942년 4월 결국 일본군에 항복했다. 맥아더 장군과 그 가족은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명령으로 항복 직전 필리핀을 탈출해 호주로 이동했다. 당시 맥아더가 남긴 “나는 반드시 돌아온다(I shall return)!”라는 말은 지금도 명언으로 널리 회자된다.

 

DPAA는 바타안 반도의 미군이 항복할 때 파워스 일병도 전우들과 함께 일본군의 포로가 된 것으로 본다. 당시 미군 포로들은 바타안 반도에서 105㎞쯤 떨어진 카바나투안의 수용소까지 걸어서 이동했는데, 무더운 날씨와 음식 부족은 물론 일본군의 학대까지 더해져 상당수 인원이 수용소에 도착하기도 전에 사망했다. 미국인들은 이 참사를 ‘바타안 죽음의 행진’(Bataan Death March)이라고 부른다. 가까스로 살아남아 수용소에 도착한 이들도 굶주림과 폭력을 견디다 못해 질병에 걸려 목숨을 잃었다. DPAA에 따르면 1945년 미군이 일본군을 물리치고 필리핀을 탈환할 때까지 2500명 이상의 미군 장병이 카바나투안 포로수용소에서 숨졌다.

1942년 4월 필리핀 바타안 반도에서 일본군에 항복한 미군 포로들의 ‘바타안 죽음의 행진’ 모습. 105㎞쯤 떨어진 포로수용소까지 걸어서 이동하는 동안 무더위와 음식 부족, 일본군의 학대 탓에 수많은 이가 목숨을 잃었다. SNS 캡처

파워스 일병은 1942년 7월18일 사망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는 다른 숨진 포로들과 함께 카바나투안 수용소 내 묘지에 묻혔다. 훗날 미군이 이 무덤을 발굴해 미군 포로로 추정되는 이들의 시신을 마닐라의 미군 묘지 및 기념관으로 옮겼다. 다만 훼손 상태가 심해 신원 확인이 불가능했고 파워스 일병은 ‘무명용사’(Unknown)라고 적힌 묘비 아래에 묻힌 채 70년 넘게 실종자로 분류될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 신원 확인이 이뤄짐에 따라 실종자 추모비에 새겨진 파워스 일병의 이름 옆에는 더는 실종자가 아님을 뜻하는 장미 리본이 놓였다.


김태훈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