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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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가만난세상] 그들이 시신 기증에 나선 이유

드라마 ‘허준’의 원작으로 더 유명한 ‘소설 동의보감’에는 허준이 스승 유의태의 시신을 해부하는 장면이 있다. 죽음을 앞둔 유의태가 “의술 정진의 계기로 삼기 바란다”며 유언을 남긴 데 따른 것이다. 물론 이는 허구다. 유의태 자체가 가상인물이다. ‘신체발부 수지부모(身體髮膚 受之父母)’라는 공자의 말을 받들었던 조선에서, 직접 시신을 해부한다는 것은 당대인의 윤리 감각에 맞지 않는 일이기도 했을 것이다.

기록상 국내에서 첫 시신 기증이 이뤄진 것은 1991년이다. 국내 1호 시신 기증자는 한의사 고(故) 박동호씨다. 1991년 8월 향년 95세로 별세한 박씨는 생전 “본인의 사망 시 서울대 의과대학 해부학 교실에 시신을 기증하며 장기 및 골격 일체를 학생들의 학습용 표본으로 사용하도록 한다”는 내용의 유언을 남기고 이를 실행에 옮겼다. 박씨는 1947년 월남한 이후 북에 있는 가족들과 만나지 못한 채 서울에서 한의원을 운영하며 검소한 생활을 해왔다고 한다.

백준무 사회부 기자

박씨의 시신 기증은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쳤다. 같은 달 해부학 교수 35명은 ‘서울지역 교육용 시체수급위원회’를 구성하고 나란히 기증 유언서를 작성했다. 이광호 전 서울의대 학장 또한 시신 기증을 서약한 이들 중 하나였다. 다음해 8월 이 전 학장이 급성 신장암으로 숨진 뒤 이 전 학장의 유해는 암세포 전이 연구 목적으로 해부됐다. 이 전 학장의 소식을 들은 박찬종 전 의원은 가족들과 함께 시신 기증을 서약했다. 누군가의 고귀한 뜻이 연쇄적으로 다른 누군가를 움직인 셈이다.

시신 기증은 쉽지 않은 일이다. 고인이 생전에 서약했어도 사후 가족들이 동의하지 않아 기증이 이뤄지지 않기도 한다. 특히 자녀들이 반대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천하의 불효자라고 하더라도 부모 육신에 칼을 댄다는 것이 달가울 순 없다. 취재 과정에서 연락이 닿은 40대 여성 안모씨 역시 가족의 반대에 부딪혔다고 했다. 안씨는 20대 시절 이미 시신 기증을 서약한 터였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 남편과 아들은 안씨를 말렸지만, 안씨는 어렵게 가족을 설득했다.

이들이 시신 기증을 결심한 이유는 모두 같았다. 의학의 발전이 곧 사회의 발전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믿음, 자신도 여기에 기여하고 싶다는 소박하면서도 고귀한 신념 때문이었다. 카데바 부실 관리 논란을 촉발한 가톨릭대의 소식을 듣고도 기꺼이 기증서에 서명했을지는 알 수 없다.

늦게나마 보건당국이 실태 파악과 법령 개정에 착수한 것은 다행이다. 일각에서는 이번 논란을 계기로 참관 대상을 제도적으로 넓힐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질병이 생기기 전 단계에 초점을 맞춘 예방의학의 중요성이 높아진 만큼 운동 지도자 등 역시 관련 교육을 받을 필요성이 있다는 논리다. 일견 타당한 말이다. 추후 사회적 공론화를 거쳐 시민들의 이해와 공감을 구할 수 있다면 가능한 일이라고 본다. 그러나 이미 기증을 서약하고 눈을 감은 이들에게 다시 의사를 물을 수는 없는 일이다. 지금은 생전 그들의 뜻을 존중하는 것이 우선이다.


백준무 사회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