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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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 후 사라지는 음주 운전자들 [수민이가 고발해요]

40대 직장인 A씨는 최근 음주운전을 하다 가벼운 접촉 사고를 냈다. 사고 차량은 접촉 흔적이 없을 정도로 멀쩡한 상태였다. A씨는 별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B씨에게 양해를 구한 뒤 현장을 떠났다. 사건은 다음날 불거졌다. B씨가 A씨를 음주 도주로 경찰에 신고 한 것이다. 신고를 받은 경찰은 차량 번호판을 조회해 운전자의 출석을 요구했다. 하지만 전화를 받은 사람은 법인차 관리자로 운전자를 특정하지 못했다. 그렇게 이틀이 지났다. A씨는 사고 셋째날에야 경찰에 출석했다. 결국 A씨는 음주운전 혐의는 빠지고 도주만 인정돼 벌금형을 받았다.
지난 13일 부산 해운대구청 어귀삼거리에서 구청 방향을 달리던 벤츠 승용차가 가로등을 들이받고 전도된 모습. 해운대경찰서 제공

음주운전을 하다가 교통사고를 내면 현장을 이탈하는 사례가 이어지고 있다. 잠적해 술이 깨면 음주를 특정하기 어려워져 면죄부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 가수 김호중의 음주운전 사태를 통해 알려졌기 때문이다. 음주운전하다 걸리면 일단 도주하면 된다는 현행법의 허점을 공식적으로 확인시켜준 셈이다.

 

실제로 한라산을 횡단하는 산간도로에서 무면허 운전을 하다 차량 4대를 들이받고 도주한 40대가 음주 사실을 시인했다. 하지만 음주 수치가 검출되지 않으면서 음주운전 혐의는 적용받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19일 제주동부경찰서에 따르면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도주치상과 도로교통법 위반, 자동차손해배상 보장법 위반 혐의로 구속된 40대 운전자 A씨가 “사고가 발생하기 5∼6시간 전인 점심때 소주 4∼5잔을 마셨지만, 취한 상태는 아니었다”고 진술했다. 사고 당시 A씨는 경찰과 소방 당국이 출동하기 전 차량을 놔둔 채 달아나 음주 여부를 확인할 수 없었다.

 

경찰이 사건 발생 약 13시간 40분 만에 긴급체포해 진행한 음주 측정에서 A씨 혈중알코올농도는 0%로 나왔다. 경찰은 곧장 채혈을 진행해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검사를 의뢰했지만, 여기서도 음주 수치는 검출되지 않았다.

 

경찰 관계자는 “현행법상 피의자가 음주를 시인했어도, 음주 수치가 검출되지 않으면 음주운전 혐의를 적용할 수 없다”고 말했다.

지난 10일 한라산 성판악 탐방안내소 인근 5·16 도로에서 발생한 교통사고 현장. 제주도소방안전본부 제공

앞서 대구 동구에서도 이날 SUV(스포츠실용차) 운전자가 사고 내고 도주해 경찰이 추적에 나섰다. 지난 13일에는 벤츠 승용차를 몰다 가로등을 들이받은 사고를 낸 뒤 차를 버리고 도주한 40대가 5일 만에 경찰에 자수했다. 그는 “평소보다 수면제를 많이 복용했다”면서 음주운전을 부인했다.

 

지난 14일에는 부산 해운대해수욕장 앞 왕복 6차선 도로에서 가로등을 들이받은 운전자가 사고 후 택시를 타고 달아났다. 대전에서도 화물차 운전자와 동승자가 사고 후 차를 버리고 달아나는 일이 발생했다.

 

이처럼 가수 김호중 사건 이후 음주운전 후 사고가 발생하면 도주하는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 단순히 음주운전만 했다면 도주 후 법망을 피해갈 수 있기 때문이다.

 

경찰 관계자는 “가수 김호중 처럼 음주운전 후 무작정 도주로 상황을 모면하려는 일들이 늘어나고 있어 단속에도 난항을 겪고 있다”며 “‘제2, 제3의 김호중들’이 속출하기 전에 강력한 법이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


김기환 기자 kkh@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