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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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칠 생가에 모인 유럽 정상들 [김태훈의 의미 또는 재미]

영국 수도 런던 인근 블레넘 궁전(Blenheim Palace)은 18세기에 지어진 대저택이다. 역사적 의미와 건축학적 가치를 인정받아 198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흔히 ‘로열패밀리’로 불리는 왕족이 살지 않는데도 궁전이란 명칭이 붙은 것은 건립 주체가 왕실이기 때문이다. 1704년 독일 블렌하임에서 영국과 프랑스가 유럽의 패권이 걸린 전투를 벌였다. 여기서 말버러 공작이 이끄는 영국군이 프랑스군을 대파하자 왕실은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궁궐을 하사했다. 블레넘은 독일 지명 ‘블렌하임’의 영어식 발음이다. 말버러 공작의 후손으로 훗날 영국 총리에 올라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윈스턴 처칠(1874∼1965)이 바로 이 블레넘 궁전에서 태어나 유년시절을 보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인 1948년 5월 윈스턴 처칠 전 영국 총리(의자에 앉아 있는 인물)가 이른바 ‘유럽합중국’의 비전을 제시하는 연설을 한 직후 유럽 대륙 국가 지도자들의 기립박수를 받으며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있다. 김영사 제공

2차대전이 한창이던 1940년대 중반 처칠은 전후 ‘유럽합중국’(United States of Europe)의 건설을 구상했다. 이 용어는 미국의 정식 국호인 미합중국(United States of America)에서 차용한 것이다. 어머니가 미국인인 처칠은 평생 미국을 흠모했다. 섬나라 영국의 입장에서 보면 유럽 대륙은 비좁은 공간 안에 크고 작은 여러 나라가 다닥다닥 붙어 있는데, 그로 인한 영토 분쟁이 결국 대규모 전쟁으로 비화한 사례가 많았다. 수백년간 옥신각신 다툰 프랑스와 독일이 대표적이다. 50개주(州)가 합쳐 미합중국이 되었듯 유럽 대륙 국가들이 서로 통합해 유럽합중국을 만들면 항구적 평화를 보장할 수 있다고 처칠은 믿었다. 통합 유럽의 두 축은 바로 프랑스와 독일이었다.

 

문제는 처칠의 머릿속 유럽합중국의 개념에 영국은 빠져 있다는 점이다. 처칠이 남긴 말들 가운데 유명한 것으로 “우리(영국)는 유럽과 함께하지만, 그 일부는 아니다”라는 발언이 있다. 영국 본토만이 지리적으로 유럽에 속할 뿐 영국의 전체 영토는 세계 모든 대륙에 걸쳐 있다는 얘기다. 인도,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등을 거느린 대영제국의 위세가 남아 있던 시절이니 처칠이 그렇게 여긴 것도 당연하다. 1940년대 말 유럽 통합 논의가 본격화하고 프랑스의 주도 아래 그 첫 단계로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를 출범시키는 방안이 제기됐을 때 영국은 소극적 태도로 일관했다. ECSC가 유럽공동체(EC)로 확대된 뒤에는 이미 늦었다. 1973년 영국은 EC에 가입했으나 프랑스와 독일에 밀려 존재감을 발휘할 수 없었다. 이는 EC가 지금의 유럽연합(EU)으로 개편되고 나서도 마찬가지였다. 2016년 브렉시트(영국의 EU 탈퇴)는 예고된 수순이었다. 프랑스·독일 공동 리더십이 굳건한 EU에 영국이 설 자리는 없었던 것이다.

18일(현지시간) 영국 런던 인근 블레넘궁에서 열린 유럽정치공동체(EPC) 정상회의에 참석한 유럽 각국 정상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18일(현지시간) 블레넘궁에 40명도 훨씬 넘는 유럽 정상들이 모였다. 2022년 EU와 별개로 출범한 유럽정치공동체(EPC) 정상회의 때문이다. EU 회원국이 되길 강력히 희망하지만 이슬람 국가라는 이유로 ‘과연 유럽의 일부인가’란 의구심에 시달리는 튀르키예부터 과거 소련(현 러시아)의 일부였던 아르메니아, 몰도바 같은 국가들까지 총망라한 국제기구가 바로 EPC다. 회의를 주재한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는 “영국이 EU의 일부는 아니지만 유럽의 일부”라며 “차이점이 아닌 공통점을 재발견함으로써 EU와의 관계를 재설정하고 싶다”고 말했다. 브렉시트 이후 영국은 EU와 무관해졌다. 다만 영국이 유럽에 있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자신의 생가를 찾은 유럽 정상들을 지켜보며 처칠이 어떤 생각을 했을지 궁금하다.


김태훈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