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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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진의 ‘에스파냐 이야기’] (34회) 메리다 : 한 달 살기 해보고 싶은 2000년 역사 도시

멀고도 가까운 나라 스페인

스페인은 우리나라와 수교한 지 올해 73주년을 맞은 유럽의 전통우호국이다. 과거에는 투우와 축구의 나라로만 알려졌으나 최근 들어 우리나라 사람들이 즐겨 찾는 주요한 유럽 관광지다. 관광뿐 아니라 양국의 경제· 문화 교류도 활발해지는 등 주요한 관심국으로 부상하고 있다.

 

이은진의 ‘에스파냐 이야기’ 연재를 통해 켈트, 로마, 이슬람 등이 융합된 스페인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소개한다.

메리다의 로마교. 필자 제공

쾌적한 기후와 우수한 지정학적 위치에 있는 곳은 사람들이 탐낸다. 스페인의 메리다가 그런 곳이다. 메리다 시의 기원은 BC 2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지금의 스페인 지역인 루시타니아 지방에 ‘에메리투스 아우구스타(Emeritus Augusta)’ 라는 식민지를 세웠다. 그 당시 이상향이었던 로마를 모델로 본떴다.

 

메리다는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면서 숨 쉰다. 메리다에 가면 2000년 전 로마의 유적이 지금도 실생활에서 사용되고 있어 놀랍다. 로마 시대를 재현한 거대한 옥외 박물관이다. 그중에 압권은 구아디아나 강을 가로지르는 로마교이다. 사람들이 이 다리를 건너 바쁘게 도시 사이를 오간다. 이 다리는 길이 792m, 총 60개의 아름다운 화강암 아치로 만들어졌다. 고풍스러운 화강암의 예술미가 돋보이며, 특히 인공조명에 빛나는 밤의 로마교는 물 위에서 춤추는 환상적인 조각품이다.

밀라그로스 수도교 유적. 로마 시대에 만들어진 수도시스템인 수도교 옆으로 스페인의 고속열차인 AVE가 지나가고 있다. 2000년의 역사가 공존하는 순간이다. 필자 제공

2000년의 역사가 함께 있는 또 다른 신기한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로마 시대에 도시에 수돗물을 공급하던 수도교 유적 옆으로 스페인이 자랑하는 자국산 고속열차인 AVE가 지나가고 있었다. 2000년 넘은 로마 유적은 곳곳에 있다. 도시의 동쪽 중심에 터를 잡은 메리다의 원형극장도 BC 15년경에 지어졌다. 6000석 규모의 원형극장은 돌기둥으로 만들어진 2층 구조로 지어졌다. 이 원형극장에서는 1930년대부터 고전 연극 축제를 개최하면서 아직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니 로마인들의 건축 기술에 다시 한 번 감탄한다. 바로 인접한 원형 경기장은 기원전 BC 8년 검투사 대회를 위해 지어졌다. 영화 ‘글레디에이터’에 나온 것과 같은 모습이다. 1만4000석 규모의 아름다운 타원형으로 만들어졌다.

메리다 로마 원형극장. 필자 제공
메리다 로마 원형 경기장. 필자 제공

우리에게 잘 알려진 로마 유적 이외에도 다이애나 신전, 포럼 등 공공 건축물과 정수 및 폐수 시스템 등도 그대로 남아있다. 물론 유적 중에는 그 당시의 일상생활을 대표하는 카사 델 안피테아트로(Casa del Anfiteatro), 까사 바실리카(Casa Basílica), 까사 델 미트레오(Casa del Mitreo)처럼 개인의 주택들도 있다.

메리다 다이애나 신전. 필자 제공

메리다는 로마 시대 이후에도 여러 역사적 흔적을 남겼다. 가톨릭 히스파니아 교구의 수도였고, 게르만 민족인 수에비족과 서고트족의 왕족이 한동안 지배하기도 하였다. 서고트(Visigoth) 시대의 강화된 성벽도 남아있다. 세월이 더 흘러 아랍의 지배를 받게 된 메리다는 톨레도, 사라고사와 함께 이베리아반도를 지배한 무슬림 왕국인 알 안달루스(Al-Andalus)의 세 국경 수도 중 하나였다. 이슬람 시대의 성(城)인 알카사바(Alcazaba)과 알히베(물탱크)가 그 당시 시대 모습을 말해준다.

알카사바 지하에 있는 알히베(물탱크). 알 안달루스 이슬람 왕국 시절의 성(城)이었던 알카사바 지하에는 수도를 끌어와 지하에 저장하여 사용하던 물탱크가 그대로 남아있다. 필자 제공

메리다는 1993년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유산도시로 지정되었다. 메리다에서 로마시대의 유적만 구경해도 하루는 훌쩍 지나간다. 메리다는 잘 보존된 이러한 고고학 유적들 덕분에 로마 시대 이후 2000년 동안 유럽의 도시가 어떻게 바뀌어왔는지 그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박물관 도시가 되었다. 짧은 여행으로 둘러보기에 아쉽다면 천천히 머물고 살며 역사 속으로 들어가 보시라.

 

이은진 스페인전문가·문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