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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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포럼] “동독은 외국 아니다”라고 한 서독

체제 경쟁 패한 동독의 ‘두 국가론’
“우린 통일할 사이”라며 끝내 거부
요즘 북한 행태는 동독 전략 답습
말려들지 말고 통일 대비 계속해야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우승국은 금메달 49개를 딴 소련(현 러시아)이다. 2위 동독이 40개, 4위 서독은 10개의 금메달을 각각 수확했다. 독일이 통일 국가였다면 금메달 50개로 소련을 제치고 1위가 되었을 것이다. 동·서독을 합쳐도 인구가 1억명에 한참 못 미치는데 어떻게 이런 성취가 가능했을까. 그 시절 극심했던 동서 냉전과 무관치 않다. 동·서독 공히 올림픽을 체제 경쟁의 무대로 여긴 가운데 특히 동독의 집착이 대단했다. ‘서독보다 잘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나라 형편에 안 맞는 엄청난 비용을 엘리트 체육에 쏟아부었다.

독일은 분단 후에도 1964년 도쿄 올림픽까진 단일팀을 내보냈다. 그러다가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부터 동·서독이 따로 대표팀을 꾸렸다. 당시는 동독이 외국을 상대로 “동·서독은 서로 다른 두 국가”란 주장을 펼치던 때다. 1960년대 들어 동독은 주민들의 생활 수준 등 여러 면에서 서독에 크게 뒤졌다. 체제 경쟁에서 패한 것이다. 경제대국으로 부상한 서독은 ‘동독과 수교한 나라와는 외교관계를 맺지 않는다’는 할슈타인 원칙을 무기로 동독을 압박했다. 약자인 동독이 국제사회에서 존재감을 발휘하려면 ‘독일 통일 이후에 없어질 나라’라는 냉소 어린 시선을 극복해야만 했다.

김태훈 논설위원

1969년 서독에 좌파 성향의 사회민주당 정권이 들어서며 변화가 일었다. 빌리 브란트 총리는 소련과의 관계를 중시하며 동독에 대해서도 온건한 태도를 취했다. ‘동독의 존재 자체를 인정 못 하겠다’는 기존 보수 정부의 강경한 입장에서 한발 뒤로 물러나 타협 가능성을 모색했다. 할슈타인 원칙을 폐기하고 1972년에는 동·서독 기본조약도 체결했다. 여기엔 양측이 상호 간 독립과 주권을 존중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이듬해인 1973년 동·서독은 나란히 유엔 회원국으로 가입했다.

그렇다고 서독이 동독의 ‘두 국가론’까지 받아들인 것은 결코 아니다. 1974년 동·서독은 서로의 수도에 상주대표부를 설치했다. 협상 과정에서 동독은 서독과의 공식 수교를 간절히 원했다. 대표부 아닌 정식 대사관 개설과 대사 임명을 서독에 강력히 촉구했다. 하지만 서독은 단호히 거절했다. “동독은 외국이 아니므로 외교관계를 맺을 수 없다”는 이유를 들었다. 대사관보다 격이 낮은 대표부를 고집해 결국 관철했다. 동베를린에 주재할 서독 대표부의 최고 책임자는 대사 말고 그냥 ‘대표부장’으로 불렸다. 동독 측에 ‘우리는 언젠가 통일해야 하는 사이’라는 점을 확실히 각인시킨 것이다. 훗날의 역사는 서독의 선택이 옳았음을 보여준다.

그간 남북 사이에는 ‘국가 대 국가가 아니고 동족 간에 통일을 지향하는 특수관계’라는 암묵적 합의가 있었다. 그런데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할아버지 김일성, 아버지 김정일도 믿었던 이 논리를 배척한다. 2023년 12월 김정은이 남북을 가리켜 “적대적인 두 국가 관계, 전쟁 중인 두 교전국 관계”라고 규정한 뒤 북한에선 ‘통일’이란 단어가 자취를 감췄다. 남한과의 체제 경쟁에서 완패한 북한이 1960∼1970년대 동독처럼 행동하는 것 아니겠는가. 우리의 대응은 서독과 같아야 함이 마땅하다. 그런데도 야당인 더불어민주당 등 일각에선 김정은의 ‘두 국가론’에 동조하는 듯한 발언이 나오고 있으니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김정은의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로 통일이 더 어려워진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고 통일 준비에 손을 놓고 있을 수만은 없다. 독일 전문가로 통하는 김황식 전 국무총리가 저서 ‘독일의 힘, 독일의 총리들’에서 소개한 일화다. 서독 총리에서 물러난 브란트가 1989년 10월 한국을 방문했을 때 그에게 독일과 한국의 통일 전망을 묻는 질문이 쏟아졌다. 브란트는 “한국이 독일보다 빠를 것”이라고 답했다. 그로부터 얼마 뒤 베를린장벽이 무너졌다. 이를 두고 ‘브란트가 한반도 정세에 어두웠구나’ 할 수 있겠으나, 뒤집어보면 독일 통일이 그만큼 느닷없이 순식간에 닥친 일임을 깨닫게 된다. ‘준비된 사람만이 기회를 잡을 수 있다’는 옛말을 새삼 실감한다.


김태훈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