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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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문화] 심지어 詩도 사람을 해칠 수 있다

연구·개발에 대한 학자들의 집요함
때론 인류를 위험에 빠뜨릴 수도
아인슈타인·오펜하이머 후회처럼
의도치 않은 활용까지 고민해야

슈테판 클라인이 세계적인 과학자들과 대화한 내용을 담은 책 ‘우리는 모두 별이 남긴 먼지입니다’에는 물질을 둘러싼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그 첫 대화의 상대는 화학자이자 시인인 로알드 호프만이다. 가장 좋아하는 분자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호프만은 헤모글로빈이라고 대답한다. 그는 헤모글로빈이 바로크 예술처럼 복잡한 아름다움을 지녔다고 말하며, 헤모글로빈이 혈관을 따라 돌아다니면서 끊임없이 변신하는 과정을 오디세우스 이야기에 빗대기도 한다. 감성이 풍부한 이 화학자에게는 과학과 예술은 보이지 않는 진리와 아름다움을 탐구한다는 점에서 크게 다르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인터뷰 후반부로 가면서 화제는 호프만이 유대인으로서 겪어야 했던 세계대전과 소년 시절, 그리고 이민자로서의 삶으로 옮겨간다. 과학자의 길을 선택하고 연구를 수행하는 일 역시 객관적인 중립의 영역이 아니라 사회적, 정치적 자장 안에 놓여 있음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오히려 과학은 개인적 연구보다 하나의 시스템 속에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 성과도 과오도 함께 떠안아야 하는 특성이 있다.

나희덕 시인·서울과학기술대 교수

예컨대 클라인의 이런 질문은 호프만의 폭발물 연구의 빛과 그림자를 정확하게 조준하고 있다. “교수님과 동료이신 로버트 우드워드가 정립한 규칙은 유기화학에서 전혀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었습니다. 당시까지 아무도 생각해보지 못한 물질을 갑자기 생산할 수 있게 되었죠. 혹시 그 물질 중에 이 세상에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것도 몇 개 있을까요?”

그에 대한 호프만의 대답은 이렇다. “폭발물, 실패로 돌아간 의약품, 독극물 등에 대한 내 책임을 묻는 게로군요. 간단히 얘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우드워드와 나는 화학자들의 사고방식을 바꿔놨어요. 우리는 과거에 아무도 깨닫지 못했던 연관성을 보여주었죠. (중략) 지금 나는 한 건의 특허권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나의 일은 선생의 일이었지, 발명가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문답이 오간 뒤에도 클라인은 호프만을 향해 꽤 집요하게 질문을 던진다. 인류를 해치거나 재앙이 된 몇몇 물질에 대한 화학적 발견과 예측 방법을 둘러싼 과학자의 책임과 윤리에 대해 되묻는다. 호프만은 자신에게는 그런 발견과 관련된 특허권도 없고 “결국 그 신물질이 진짜 약으로 나왔을 때, 나는 단돈 1원도 못 벌었다”고만 답한다. 호프만은 “심지어 시도 사람을 해칠 수 있다”고 하면서, 세상에 무언가 내놓는 사람에겐 일정한 책임이 따르지만 “과학에서는 최종 결과물에 대한 책임을 정확히 어느 개인이 져야 하는지를 확정하기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여기에 이르면 세상에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물질들에 대한 책임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니라 과학적 연구라는 익명적 시스템 자체로 환원되어버린다.

“과학자란 한 사회 시스템의 구성원”이라는 호프만의 말이나 “과학은 수십만 명이 함께 맞춰나가는 어마어마하게 복잡한 퍼즐” 같다는 클라인의 말은 모두 과학과 과학자의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한 사람의 연구는 작은 조각 두세 개를 만들거나 맞춰 넣어 큰 퍼즐에 기여하면 될 뿐이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어떤 물질이 세상에 필요한지 필요하지 않은지, 도움이 될지 해악이 될지는 개인의 차원에서 예측하거나 판단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자신의 연구나 발견이 지닌 위험성을 확인하게 될 때, 과학자의 마음에 후회나 죄책감은 여전히 남을 것이다. 아인슈타인이 그러했고, 오펜하이머가 그러했다. 독일에 앞서 미국이 원자폭탄을 개발하는 일에 동의했던 아인슈타인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을 보면서 자신의 선택을 후회했다. ‘맨해튼 프로젝트’를 지휘했던 오펜하이머 역시 나중에는 청문회장에서 수모를 겪게 되었다. 호프만이 학문적인 공헌을 이야기하면서도 그로부터 경제적 이익을 얻지 않았음을 강조하는 것도 비슷한 자책감에서 나온 방어적 표현이 아닐까. 이것이 어찌 과학자만의 문제일까. 자본과 권력의 도구적 역할에만 충실한 지식인들과 전문가들을 보며, “심지어 시도 사람을 해칠 수 있다”는 호프만의 말을 여러 번 되뇐다.

 

나희덕 시인·서울과학기술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