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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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근처 번화가서 회식, 20대 미용사 속옷 없는 시신으로

부산 '농수로 살인' 초기 범인 혈액형 오인 [사건 속 오늘]
정액속 DNA 재분석, 특정 성씨 밝혀내 '미제1호' 해결 기대

24년 전 오늘 오후 1시 20분께 강서구 대저동 농수로에서 미용사 이 모 씨(당시 25세·여)의 시신이 발견됐다. 이 씨의 질 내에서 정액이 검출되면서 경찰은 DNA 증거를 확보했으나 끝내 범인을 특정하지 못했다. 범인의 DNA가 남아있는 만큼 부산경찰 미제팀은 이 씨 사건의 해결 가능성을 높게 보고 미제 1호로 지정, 우선순위로 두고 있으나 시간만 흐른 채 사건은 여전히 미궁에 빠진 상태다.

 

사진=SBS '그것이 알고 싶다' 캡처

◇ 집 근처 번화가에서 회식…다음 날 강 건너 농수로에서 발견된 피해자

 

부산 화명동 미용실에서 근무하던 이 씨는 2000년 7월 27일 평소처럼 퇴근 후 덕천동으로 이동해 동료들과 회식 자리를 가지고 다음 날 0시 20분께 헤어졌다. 동료들과 헤어진 지점에서 이 씨의 집까지는 400m 정도로 도보 5분밖에 걸리지 않는 거리였으나 이 씨는 낙동강 건너편 대저동 농수로에서 시신으로 발견됐다.

 

발견 당시, 이 씨는 상·하의 옷을 다 입고 있었으나 속옷과 구두만 사라진 상태였다. 이에 경찰은 질액을 채취해 정액을 확인했으나 당시만 해도 DNA 분석력이 지금에 비해 현저히 떨어졌던 터라 범인의 혈액형이 A형인 것만 확인됐다. 부검 결과 사인은 경부압박질식사로 범인은 성폭행 후 이 씨의 목을 조른 것으로 밝혀졌다.

 

사진=SBS '그것이 알고 싶다' 캡처

◇ 반항흔 하나 없이 풀만 꼭 쥔 채 굳은 손

 

이 씨는 성폭행을 당한 뒤 살해됐으나 희한하게도 이 씨의 몸에서는 반항흔이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다만 이 씨는 한쪽 손에 풀을 꼭 쥔 채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보통 사람이 사망하면 근육이 이완되면서 몸이 늘어진 뒤 얼마간의 시간이 경과하고 몸이 굳는데, 이 씨는 극도의 긴장 상태로 근육에 힘을 주고 있다가 사망하면서 그대로 빠르게 몸이 굳은 것이었다.

 

이 씨가 저항 의지를 완전히 상실한 채 성폭행을 당한 것으로 봤을 때 범인은 한 명이 아닌 2명 이상일 것으로 경찰은 추정했다. 일대일의 관계였다면 범인이 피해자를 제압하기 위해 남긴 폭행 흔적과 피해자가 반항한 흔적이 많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덕천동에서 동료들과 헤어진 이 씨를 10분 뒤인 0시 30분께 마지막으로 본 목격자는 이 씨를 태워 간 차에 3명의 남성이 타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노래방을 운영하는 목격자는 당시 손님의 담배를 사러 나왔다가 이 씨와 똑같은 생김새의 여성 앞에 어두운색 승용차가 멈춰 섰다고 기억했다. 그러면서 조수석에서 한 남자가 내린 뒤 이 씨와 짧은 대화를 나눴고 이 씨가 차 뒷자리에 탔다고 말했다.

 

사진=SBS '그것이 알고 싶다' 캡처

◇ "(편)면식범이 그레이팅 있는 실내에서 성폭행"

 

목격자에 따르면 당시 이 씨가 차에 탄 장소는 번화가였던 만큼 인파도 많았고, 또 이 씨가 강제로 차에 태워진 것도 아니었으므로 경찰은 범인이 면식범일 것으로 봤다. 혹은 미용사였던 이 씨의 직업 특성상 범인만 피해자를 알고 있었던 편면식 관계일 수도 있다고 봤다. 이 씨는 기억을 못 하지만 한두 번 손님으로 왔을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또 발견 당시 구두를 신고 있지 않았던 이 씨의 발바닥은 깨끗한 상태였기에 범행 장소는 실내였을 것으로 추정됐다.

 

이 씨의 시신에는 또 하나의 특징적인 단서가 있었다. 몸 오른쪽 팔과 다리에만 남은 직선 형태의 상처로, 상처는 4~5㎝ 간격으로 반복돼 나타났다.

 

전문가들은 하수구의 뚜껑에 사용되는 철제 판 '그레이팅'으로 인한 상처일 것으로 봤는데, 이 씨가 오른쪽으로 모로 누워있는 상태에서 범인이 이 씨의 다리를 잡아끌고 가면서 그 과정에서 그레이팅 위를 지나갔을 것으로 추정했다.

 

사진=SBS '그것이 알고 싶다' 캡처

◇ 태완이법 적용돼 공소시효 정지

 

경찰은 범인이 2~3명의 면식범이며 공장 등 그레이팅이 설치돼있을 만한 장소에서 생활하고, 농수로 주변 지리를 꿰뚫고 있을 것으로 보고 주변 인물을 조사했으나 끝내 범인을 특정하지 못했다. 또한 이 씨의 전 연인 2명도 유력한 용의선상에 올리고 수사를 했으나 용의선상에서 배제됐다. 혈액형이 A형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200여 명을 대상으로 수사한 경찰의 노력에도 범인이 잡히지 않아 미제로 남은 이 씨 사건은 원래 2015년 7월 28일 공소시효가 만료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부산경찰이 2015년 7월 31일부터 시행된 '태완이법'을 이 씨 사건에도 적용하기 위해 애썼고, 법률 검토를 통해 단 사흘 차로 영구미제 사건으로 남을뻔했던 이 씨 사건의 공소시효는 정지됐다.

 

사진=SBS '그것이 알고 싶다' 캡처

◇ 범인, A형 아닌 O형이었다…부산 경찰 "성씨까지 확인, 꼭 잡겠다"

 

2015년 경찰은 이 씨 사건을 재수사하며 DNA를 재분석했는데, DNA 분석 기술이 발전하면서 범인의 혈액형이 A형이 아닌 O형인 것으로 밝혀졌다. 그동안의 수사 기록이 무용지물로 전락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의미 있는 분석 결과도 나왔다. 범인의 DNA를 통해 그가 특정 성 씨라는 걸 알게 된 것이다. Y염색체의 배열은 성씨마다 조금씩 다르게 나타나는데 이 DNA 정보를 통해 경찰은 범인의 성씨를 확인했다.

 

부산청 미제팀 형사는 SBS '그것이 알고 싶다'와의 인터뷰에서 "모든 접촉은 흔적을 남긴다는 과학수사의 대명제가 있다"며 "화성살인사건과 같이 용의자의 DNA가 확인돼 이춘재가 특정된 것처럼 수십 년이 지난 사건도 계속적으로 관심을 가진다면 반드시 해결할 수 있다고 저희는 믿고 포기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뉴스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