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사도광산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진 27일 오후 2시쯤, 사도광산을 소개하는 시설인 니가타현 사도시 기라리우무사도에 모인 100여명의 일본인들은 금빛 막대풍선을 흔들며 크게 기뻐했다.
등재를 결정한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상황을 실시간으로 전하는 TV화면에 조선인 강제노동 등 전체 역사를 알리겠다는 일본의 약속이 제대로 지켜지길 바란다는 한국 대표의 연설 장면이 나왔지만 관심의 대상은 아니었다. 한 30대 남성 참석자는 “한국과 (사도광산 등재 여부를 두고) 의견 차이가 있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구체적인 내용은 모른다”고 말했다.
인도 뉴델리에서 이날 열린 제46차 세계유산위원회의 사도광산 세계유산 등재 결정을 접한 일본의 분위기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한국을 포함한 위원회 회원국 전부가 동의했다. 가노 다케히로(加納雄大) 주유네스코 일본대사는 “세계유산위원회 결정과 이와 관련된 일본의 약속을 명심할 것”이라며 “사도광산에 대한 한·일 간 의견 차이를 원만히 해결하려는 의지를 보여주기 위해 일본은 이미 모든 노동자와 그들의 고된 작업 조건 및 고난을 설명하는 새로운 전시 자료와 해설 및 전시 시설을 현장에 설치했다”고 밝혔다.
일본인들이 잘 모르거나 관심이 없는 조선인 강제노동과 관련된 사도광산의 역사, 가노 대사가 약속을 실천했다고 한 내용을 담고 있는 곳이 사도시 ‘아이카와 향토박물관’이다. 사도광산은 19세기 중반까지 전통적 수공업 금생산이 이어졌고 20세기 들어서도 채광이 진행돼 일본이 “근대화를 떠받쳤다”고 선전하는 유적이다. 동시에 일제강점기 조선인이 강제동원돼 노역했던 아픈 역사가 서린 곳이다.
사도광산의 역사를 전하는 아이카와 박물관에 ‘조선반도(‘한반도’의 일본식 표기) 출신자를 포함한 광산 노동자의 생활’ 전시실이 만들어져 28일 공개됐다.
전시 내용은 ‘출신지’, ‘생활’, ‘노동환경’을 축으로 한다. 출신지 관련 전시물은 1940∼1945년 “조선반도 출신 노동자 총수가 1519명이었다”고 적었다. 또 1944년 9월부터 “법령에 기초한” 징용이 시행돼 “위반 시 징역 혹은 벌금이 부과됐다”고 밝혔다. 관련 사진과 함께 임금이 지급되지 않은 사례가 있다는 점도 인정했다.
생활 부분에서는 1945년 자료를 토대로 7명이 도주했고, 이 중 3명이 “형무소에 들어갔다”고 설명했다. ‘조선반도 출신자를 포함한 노동자의 전시 중 가혹한 노동환경’이란 제목의 전시물에는 일본인에 비해 “조선인 노동자가 위험한 작업에 종사하는 비율이 높았다는 걸 보여주는 자료가 남아 있다”고 설명했다. 위험한 작업은 화약을 사용하기 위해 암반 등을 뚫는 것, 낙석 위험이 높은 곳에 지지대를 세우는 것, 채굴한 광물을 옮기는 것을 들었다. 이 작업을 담당한 조선인, 일본인 노동자 수를 비교하는 표(1943년 7월 기준)를 제시했는데 암반 뚫기의 경우 각각 123명, 27명으로 조선인이 4배 이상 많았다. 이런 내용을 뒷받침하는 당시 일본 경찰의 자료 등의 사본도 전시했다.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일본 총리가 지난해 5월 서울을 방문해 “당시(일제강점기) 혹독한 환경 속에서 많은 분이 매우 힘들고 슬픈 경험을 하신 데 대해 가슴이 아프다”고 말한 것을 적어 액자로 만들고 전시한 것은 나름의 성의를 보이기 위한 것으로 읽힌다.
아이카와 박물관이 1층 출입구에 비치한 별지 팸플릿에는 해당 전시실과 인근에 산재한 취사장, 조선인 노동자 숙소 등의 위치가 지도와 함께 표시돼 있다. 공터로 방치돼다시피 했던 해당 장소에는 안내판이 설치될 예정이다. 일본은 사도광산 노동자들을 위한 추도식을 중앙·지방 정부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매년 사도에서 개최할 것을 약속했는데 올해 첫 행사는 이르면 9월에 열린다.
강제노역을 포함한 사도광산 전체 역사를 알리는 허브가 된 아이카와 박물관은 메이지시대 일본 왕실 재산을 관리했던 관청 건물이었다는 가치를 인정받은 일본 지정문화재(사적)다. 이런 곳에 일제강점기 강제동원과 관련된 사실이 전시된다는 점은 일정한 의미를 가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일본이 강제성을 분명하게 표시하지 않은 점에서 진의를 의심할 수밖에 없다. 아이카와 박물관 전시물의 어디에도 조선인 노동자들이 ‘자신의 의사에 반해’ 끌려왔다거나, ‘강제’라는 표현은 없다. 일본 정부도 강제동원에 대한 언급 없이 “전통적 수공업에 의한 금 생산의 발전 단계를 보여주는 드문 문화유산”이라며 등재 성공을 자축할 뿐이었다.
이에 대해 이날 현장에서 만난 고스기 구니오(小杉邦男) 전 사도시 의원은 “지금까지 숨겨져 온 자료가 전시되었다는 점은 인정할 만하다”면서도 “강제성을 분명하게 하지 않아 당시 상황을 모르는 관람객이라면 강제동원 사실을 인식하기가 어려울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일 관계 전문가인 요시자와 후미토시(吉澤文壽) 니가타국제정보대 교수는 “조선인 노동자들이 어디서 어떻게 생활했는지 전혀 적혀 있지 않다”며 “가장 중요한 것은 역사적 사실을 담담히 적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전시 내용이 보충되거나 충실하게 바뀔 것으로 기대하기도 힘들어 보인다. 일본 정부는 한국 정부와 협의할 것이라면서도 강제동원과 관련된 자료나 내용을 추가하는 데 부정적인 것으로 알려졌다.
어정쩡한 태도는 전체 역사를 보여주라는 한국, 유네스코 등 국제사회의 압력과 일제강점기 조선인 강제동원 인정에 강한 거부감을 보이는 자국 내 보수층 여론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한 결과로 보인다. 한국 정부는 사도광산 등재 추진 과정에서 일본에 강제동원 사실이 설명되지 않은 경우 등재를 반대할 것이라는 입장이었고, 유네스코도 같은 취지의 권고를 지난달 발표했다. 그러나 이런 압력을 전적으로 수용하기엔 일본 내 여론이 부담이었다.
극우 성향의 산케이신문은 이날 ‘사도 광산 조선인 노동자 전시는 불필요해’라는 제목의 사설을 실었다. 요미우리신문은 한·일 정부 간 물밑 협상에서 “일본이 강제노동 문구를 사용하지 않는 대신 현지에 상설 전시를 하고 한반도 출신 노동자가 1500명인 것과 노동환경이 가혹했다는 점을 소개하는 방안 등을 타진해 한국이 최종적으로 수용했다”고 보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