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보다 실제 저지른 범행의 죗값보다 가벼운 처벌을 받게 할 수 없다는 생각이 컸습니다”
피해자 진술 외에는 증거가 없는 성폭행 사건에서 과학 수사를 통해 준강간 혐의를 밝혀낸 한 검사의 끈기가 눈길을 끌고 있다.
서울동부지검 여성아동범죄조사부 허창환(36·사법연수원 43기) 검사는 성폭행 피해를 주장한 A씨와 가해자로 지목된 B씨의 진술이 확연히 다르다는 데 주목했다. 그는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에서 증거가 나오지 않아 준강간 혐의를 적용할 수 없던 사건을 대검찰청 과학수사부 DNA·화학분석과에 보내 끝내 증거를 찾아냈다.
그는 “서로 진술이 다르면 누구 말이 맞을지 계속 고민하며 기록을 더 열심히 본다”며 “그러면 의심스러운 부분들이 하나씩 보이는데 이번 사건도 그런 케이스였다”고 돌아봤다.
A씨는 2022년 11월 B씨의 사무실에서 일하기 위해 면접을 보러 갔다가 만취 상태로 호텔에서 성폭행 당했다고 주장했다. A씨는 첫 112 신고와 경찰 조사에서 일관되게 성폭행 피해를 주장했으나 B씨는 완강히 부인했다.
국과수는 A씨 의류 등에서 B씨의 DNA를 검출했지만 정액 반응은 나오지 않았다. 경찰은 B씨를 사건 접수 9개월여 만인 지난해 8월 ‘준강제추행’ 혐의로 검찰에 보낼 수밖에 없었다. 피해자 진술 외에 뚜렷한 물증이 없는 상황에서 ‘준강간’ 혐의를 적용했다간 무죄가 나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허 검사가 여성아동범죄조사부에 발령받은 지는 5개월째다. 한 달에 처리하는 사건만 130여 건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으나 적용된 혐의와 상반되는 A씨의 진술이 마음에 걸렸다고 한다.
그는 “다른 정황을 봤을 때도 피해자 진술이 신빙성이 높다고 판단했다”며 “의심 가고 미심쩍은 부분이 있으면 보완 수사를 해서라도 확인할 수 있는 사실관계를 끝까지 파봐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떠올렸다.
이런 허 검사의 의지에 따라 동부지검은 대검찰청 과학수사부 DNA·화학분석과에 피해자 속옷의 정밀 감정을 의뢰했다. 대검 DNA·화학분석과는 국과수 감정 결과를 교차 검증해 보충·보완하거나 오류를 바로잡기도 하는 검찰 내 감정기관이다.
DNA·화학분석과는 증거물에서 시료 채취 범위를 넓혀 A씨의 타액과 정액을 검출해냈고, 허 검사는 이를 토대로 4월 A씨에게 준강간 혐의를 적용해 재판에 넘겼다.
그는 “국과수는 1차 감정을 담당하기 때문에 모든 사건을 세밀하게 들여다보기는 어려운 측면이 있다”며 “검사가 얼마나 노력하느냐에 따라 사건 방향이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지 새삼 깨닫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이 사건은 최근 대검찰청의 2분기 과학수사 우수 사례로 선정됐다. 허 검사는 지난해 광주지검 공판부에 있을 때도 직장 내 괴롭힘 사건 재판을 담당하며 4명의 폭행과 위증 혐의 등을 추가로 밝혀내 전국 검찰청 공판 우수 사례로 선정된 바 있다.
허 검사는 “혐의를 소명해 압수수색영장을 발부받아서 객관적 증거를 새롭게 찾아내 피의자가 자백하고 사건이 잘 처리될 때 보람을 느낀다”며 약자 보호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아울러 “기록도 한 번 더 살펴보고, 당사자 진술도 한 번 더 들어서 꼼꼼히 사실관계를 확인하자고 늘 다짐합니다. 우리 사회에 무언가 기여하는 검사가 되고 싶어요. 그렇게 더 노력해서 새로운 진실을 밝혀내고 최대한 억울한 사람이 안 나오도록 하고 싶다”고 밝혔다.
한편 형법은 준강제추행을 10년 이하 징역 또는 1천5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규정하나, 준강간은 3년 이상 유기징역에 처하고 벌금형은 허용치 않는다. 준강간죄는 심신상실이나 항거불능 상태를 이용한 간음을 성폭행에 준해 처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