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여자 양궁이 파리에서 올림픽 10연패를 달성한 배경에는 ‘계급장’을 떼고 경쟁하는 ‘실력주의’가 있었다. 올림픽 수상 실적 등 ‘전관예우’ 없이 오로지 국가대표 선발전 결과에 따라 태극마크를 결정하는 철저한 원칙 덕분에 10번의 올림픽이 진행되는 동안 선수들의 면면은 바뀌어도 ‘초격차’를 유지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2020 도쿄 올림픽에서 한국 선수 최초 하계올림픽 3관왕에 오른 안산(23·광주은행) 역시 파리 올림픽 출전이 좌절됐다. 안산은 지난해 항저우 아시안게임까지만 해도 태극마크를 달았지만 올해 국가대표 3차 선발전에서는 경쟁에 밀려 탈락했기 때문이다.
28일(현지시간) 단체전을 석권한 전훈영, 임시현, 남수현 모두 올림픽 경험이 전무했다. ‘에이스’ 임시현도 지난해 항저우 아시안게임서 3관왕을 차지했으나, 올림픽은 처음이었다. 올해 막 고등학교를 졸업한 남수현(19)은 물론 맏언니 전훈영(30)도 아시안게임이나 다른 국제무대에 서본 적이 없었다. 전훈영은 2020년 국가대표에 뽑혔지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탓에 그해 열릴 예정이던 도쿄 올림픽이 1년 미뤄졌고, 이후 월드컵 시리즈도 열리지 않아 출전이 불발됐다.
그러나 올림픽 금메달보다도 더 어렵다는 국가대표 선발전을 뚫어낸 만큼 실력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올림픽 랭킹라운드부터 임시현과 남수현이 1, 2위를 차지하며 기량을 입증했다. 다만 ‘맏언니’ 전훈영은 랭킹라운드에서 13위에 머물렀고, 이날 단체전 8강에서도 8점 4발, 7점 1발을 쏘는 등 부진했지만 가장 중요한 무대인 결승전에서 화살 9발 중 무려 6발을 10점에 명중시키며 맏언니로서 역할을 톡톡히 했다.
큰 대회 경험이 없는 이들이지만 위기에 몰릴수록 강해지는 정신력을 보여줬다. 우리 대표팀은 결승 1, 2세트를 모두 따내며 4-0으로 앞서나갔지만 이내 3, 4세트를 내리 내주며 4-4 동점 상황을 맞이한 상태서 슛오프에 돌입했다. 세 선수가 각각 한 발씩 쏴서 승부를 겨루는 슛오프에선 실수가 절대 허용되지 않는다. 올림픽 10연패가 각각 한 발로 결정되는 절체절명의 순간. 전훈영과 임시현은 10점, 남수현이 9점을 쏴 합계 29점을 기록, 27점에 그친 중국을 가볍게 이겼다.
여자 단체전 금메달로 대회 첫 단추를 완벽하게 끼운 임시현은 이제 올림픽 3관왕에 도전한다. 임시현은 다음 달 2일 김우진(32?청주시청)과 혼성 단체전에 나서고, 3일엔 여자 개인전에 출전한다. 임시현은 “한국이 항상 왕좌를 지킨다고 하지만 멤버가 바뀐 지금, 우리한테는 10연패가 새로운 도전이자 목표였다. 우리 도전이 역사가 될 수 있었음에 너무 감사하다”며 “개인전과 혼성 단체전도 열심히 해서 좋은 결과를 가져오겠다”고 포부를 전했다.
임시현과 함께 결승 슛오프서 10점을 쏜 전훈영은 “10연패를 이루는 데에 피해를 끼치지 않으려고 더 준비하고 훈련했다. 그래서 너무 힘들었다”며 “단체전 10연패를 가장 큰 목표로 생각하고 왔기 때문에 이제 그 목표를 이뤄서 개인전에는 조금 더 마음 편하게 경기에 임할 것 같다”고 밝혔다. 남수현은 “(금메달이) 굉장히 묵직하다”며 “꿈에 그리던 올림픽 무대를 선 것만으로 영광이었는데, 언니들과 같이 합을 맞춰 단체전 10연패의 역사를 썼다”고 기뻐했다.
윤석열 대통령도 여자 양궁 10연패를 축하하며 이들을 격려했다. 윤 대통령은 29일 페이스북을 통해 “저도 마지막 슛오프 한 발까지 손에 땀을 쥐고 응원하며 지켜봤다”며 “임시현, 전훈영, 남수현 선수에게 뜨거운 박수를 보낸다”고 밝혔다. 이어 “세 선수 모두 올림픽 경험은 없었지만 어느 대회보다 어렵다는 대한민국 대표팀 선발전을 뚫고 올라왔다”며 “대한민국 1등이 곧 세계 1등임을 다시 한 번 증명했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