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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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료는 낙인찍고 교수는 인정 거부… 수련병원 ‘가을턴’ 지원율 사실상 ‘0’

정부, 지원자 특혜 내세워도 반응 없어
서울대병원 등 빅5 지원자 30∼50명 수준

7645명 모집에 극소수만 원서
커뮤니티, 지원자 신상털기 예고
교수들은 새전공의 수련 보이콧
일부 병원의 순혈주의도 영향
“지방병원 지원율 더 저조할 듯”

31일 마감한 전국 수련병원의 ‘하반기 전공의’(가을턴) 모집이 결국 ‘0’에 가까운 지원율로 마무리됐다. 정부가 가을턴 지원자에 대한 ‘수련 특례’까지 내걸었지만 전공의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전공의들은 의대증원 및 필수의료패키지의 백지화, 처우개선 등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복귀하지 않겠다는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 일부 전공의들이 지원자에 대한 신상털기를 예고하는가 하면, 교수들도 새 전공의들에 대한 ‘수련 보이콧’을 선언하면서 복귀를 희망하는 전공의들마저 쉽사리 지원을 하기 어려웠을 것이란 분석이다. 의사 커뮤니티에서는 지원자들을 일부 특정해 신상을 공유하고 있는 것으로도 전해졌다. 일각에서는 일부 의사들의 이러한 ‘집단 카르텔’이 저조한 전문의 지원율에 영향을 미쳤다는 지적도 나온다.

속타는 환자… 끝없는 기다림 전공의 집단 사직으로 대형병원이 인력 부족에 시달리고 있는 가운데 31일 오전 서울 시내 한 대형병원에 진료 지연 안내문이 붙어 있다. 연합뉴스

31일 세계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빅5’ 병원의 가을턴 모집 지원자는 현재까지 30∼50명 수준으로 예상된다. 의료계에 따르면 서울성모병원 등 8개 병원이 소속된 가톨릭중앙의료원은 1017명을 모집했는데 1년차 4명, 상급년차(2∼4년차) 10명 등 14명이 지원한 것으로 전해졌다.

 

전공의 521명을 모집한 삼성서울병원에는 두자릿수 인원이 지원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정확한 숫자는 공개하지 않고 있다. 714명을 모집한 세브란스병원은 레지던트 1년차 3명, 상급년차(2∼4년차) 2명 등 전체 5명이 지원하는 데 그쳤다. 서울대병원의 경우 지원자가 극소수, 서울아산병원의 경우 지원자가 없거나 한 자릿수인 것으로 전해졌다. 고려대의료원 역시 레지던트 1년차 1명이 지원한 것이 전부였다.

 

나머지 수련병원들도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일부 병원에 지원자가 있지만 1∼2명 수준에 그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번에 166개 수련병원이 모집하는 하반기 전공의 숫자는 총 7645명인데, 전체 지원자가 세 자릿수가 되지 않고, 지원율이 1%에 미치지 않을 것이란 게 의료계의 중론이다.

한 대형병원 관계자는 “지원하면 바로 동료들에게 낙인이 찍히고, 교수들이 제자로 인정하지 않겠다고 거부하는 상황에 누가 쉽게 지원할 수 있겠나”라며 “수도권 병원도 지원이 없는 상황인데 지방 병원은 더할 것”이라고 말했다.

 

당초 가을턴 모집이 예고된 뒤 일부 지방 수련병원 전공의들이 빅5 등 수도권 수련병원으로 지원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정부가 하반기 지원 전공의에 대해 동일 연차·과목 복귀를 허용하고, 권역 이동도 제한하지 않기로 하면서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은 전공의들의 낙인찍기가 시작되면서 이내 가라앉았다. 이달 초 ‘감사한 의사-의대생 선생님 감사합니다’라는 이름의 한 텔레그램 채널이 개설됐고, 환자를 진료하고 있는 전공의와 전임의(펠로), 수업거부를 하지 않은 의대생에 대한 실명, 학번, 출신학교 등이 1∼2일 단위로 업데이트됐다. ‘감사한 의사’는 이들을 비꼬는 말이다. 해당 채널에는 4000명 이상이 참여했다. 채널에서는 하반기 모집에 지원하는 전공의 명단도 공개하겠다고 예고했다. 채널 개설자는 “추후 제대로 진료받지 못하는 국민들을 위해 올해 가을턴에 지원하는 선생님들이 제대로 감사받을 수 있도록 반드시 최우선으로 추가 명단 작성 예정”이라고 썼다. 경찰의 수사가 시작되면서 현재 채널은 운영되지 않고 있지만 전공의·의대생들이 주로 이용하는 의사 커뮤니티 등에서는 여전히 복귀 전공의나 전임의, 가을턴 지원자들에 대한 실명과 사진, 가족정보 등까지 공개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실제 이날 해당 커뮤니티에서는 수도권 모 수련병원에 지원한 전공의 실명 등이 올라오며 지원자를 비난하는 글이 쏟아지기도 했다. 가톨릭중앙의료원은 홈페이지에서 가을턴 지원자 현황을 공개해왔으나 이를 인지한 듯 이날 오전부터 비공개로 전환했다.

서울 소재의 한 대학병원에서 의료진이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뉴스1

복지부 관계자는 “전공의들 사이에서 낙인을 찍고 있는 것이 사실 이번 하반기 지원율이 저조한데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본다”며 “여러 경로로 이런 피해 사례를 인지하는 대로 경찰 수사 의뢰 등 조치를 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일각에서는 일부 수련병원의 ‘순혈주의’도 하반기 전공의 지원에 영향을 미친 원인으로 꼽는다. 연세대 의대 교수 비대위와 세브란스병원 교수 일부는 22일 하반기 전공의들 모집이 시작되자 “현 상황에서는 이들을 제자와 동료로 받아들일 수 없다”며 “전공의들의 자리를 비워두고 그들이 돌아오도록 지원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자교 출신 챙기기가 아니냐’는 의혹이 나왔고, 대통령실은 “카르텔을 그대로 보여준 셈”이라고 공개 지적했다. 서울대 의대 역시 하반기 모집에서 사직 전공의들의 자리를 비워둔 채 나머지 결원에 대해서만 모집 신청을 했다. 그로 인해 서울대병원은 레지던트 400명 이상이 사직했지만, 모집인원은 37명뿐이었다.

서울 종로구 서울대학교병원에서 한 의료 관계자가 이동하고 있다. 연합뉴스

세계일보가 입수한 지난해 빅5 병원의 자교 출신 전공의 현황을 보면 서울대병원의 자교 출신 인턴 비율은 68.4%에 달했다. 레지던트 1년차의 경우도 60.2%로 집계됐다. 연세대 의대 부속병원인 세브란스병원도 인턴 비율이 62%, 레지던트 1년차 비율은 47%였다. 나머지 3개 병원의 자교 출신 인턴·레지던트 비율이 18.1∼35.4% 수준인 것과 비교하면 눈에 띄게 차이가 난다.

 

익명을 요구한 한 전문의는 “이들 병원은 과거에 순혈주의가 있었고, 현재는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잔재는 남아있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한 대학병원 관계자는 “소설 같은 이야기”라며 “전공의가 학생 때부터 가르친 선생님 밑에서 배우고 싶은 건 있겠지만, 전형이 다 오픈돼 있어 자교 출신 우대는 불가능하다”고 반박했다.


이정우 기자 woolee@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