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런던 올림픽에서 원우영(42·현 대표팀 코치), 오은석(41), 김정환(41·현 KBS 해설위원), 구본길(35·국민체육진흥공단)로 구성된 남자 사브르 대표팀은 한국 펜싱 역사상 첫 단체전 금메달을 따내며 세계 펜싱계의 주목을 받았다. 이후 2015~2016시즌부터 김정환, 구본길 기존 멤버에 김준호(30·은퇴), 오상욱(27·대전광역시청)이 새로 합류하면서 한국 사브르는 전성기를 누렸다.
이들은 3년 전 열린 2020 도쿄 올림픽 남자 단체전 금메달을 비롯해 세계선수권 우승 3회(2017,2018,2022), 아시안게임 금메달 2개(2018 자카르타·팔렘방, 2022 항저우)를 합작하며 오랜 기간 전 세계를 호령했다. 2020 도쿄에서는 빼어난 기량에 수려한 외모까지 더해져 전 국민적인 인기를 끌며 ‘어펜져스’(어벤져스+펜싱), ‘F4’(Fencing4) 등의 애칭으로 불리기도 했다.
2024 파리 올림픽에도 어펜져스 4인방이 함께 나서 단체전 3연패에 도전할 것으로 보였지만, 김준호가 2022 항저우 아시안게임을 끝으로 대표팀 은퇴를 선언하고, ‘맏형’ 김정환이 부상으로 빠지면서 어펜져스는 해체되고 말았다.
두 선수의 자리를 대신한 선수들은 2012 런던에서 금메달을 보고 펜싱에 입문한 ‘런던 키즈’인 박상원(23·대전광역시청), 도경동(24·국군체육부대). 두 선수가 기량 자체는 뛰어나지만, 국제무대 경험이 적어 이번엔 남자 사브르 대표팀의 올림픽 3연패는 어렵지 않겠느냐는 우려가 나온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 걱정은 ‘기우’였다. 한국 사브르의 ‘세대교체’는 완벽하게 성공했다. 아니 박상원과 도경동이 있었기에 올림픽 3연패 단체전이 가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일(한국시간) 프랑스 파리의 그랑 팔레에서 열린 2024 파리 올림픽 펜싱 사브르 남자 단체전 헝가리와의 결승은 박상원과 도경동의 맹활약 덕분에 45-41로 이겼다.
박상원은 선봉으로 1바우트에 나서 2012 런던부터 2020 도쿄까지 올림픽 개인전 3연패에 빛나는 ‘전설’ 아론 실라지를 상대로 5-4로 승리하며 기선을 제압했고, 4바우트, 8바우트에서도 선전했다. 15득점 14실점으로 득실 마진 +1이었던 박상원을 뒷받침해준 건 후보 선수 도경동이었다. 8강과 4강에서 한번도 피스트에 서지 않아 “몸이 근질근질하다”며 하소연했던 도경동은 30-29로 앞선 7바우트에 등장해 한풀이하듯 ‘닥공’(닥치고 공격) 모드로 상대를 몰아붙여 5-0의 완승을 거뒀다. 도경동의 ‘씬스틸러’급 활약이 없었다면 경기 막판까지 접전 양상이 계속 되어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다.
도경동은 “선수로서 올림픽 금메달이 최종 목표였는데, 이룰 수 있어 꿈만 같다. 개인적 기쁨도 있지만, 한국 펜싱의 새 역사를 함꼐 해 기쁘다. (오)상욱이형의 2관왕 달성을 축하해줬다. 우리는 지금 오상욱의 시대에 살고 있다”며 에이스를 치켜세웠다.
이를 들은 오상욱은 “아직 내 시대는 아니다. 우리는 그저 ‘어펜져스’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딱 잘랐다. 그도 그럴 것이 오상욱은 금메달을 확정짓는 포인트를 내긴 했지만, 마지막 9바우트에서 실라지에게 5-8로 밀리는 등 결승에서 15점을 내는 동안 19점을 내줬다. 그는 “단체전에서 수월하게 끝냈다면 30분 정도는 자만할 수 있었겠지만, 마무리가 아쉬웠다”고 돌아봤다.
개인전 금메달을 따낸 후 몸살을 앓아 컨디션이 저하된 오상욱과 이번 파리에서 내내 컨디션이 떨어진 ‘맏형’ 구본길을 깨운 것도 도경동이었다. 오상욱은 “피스트 아래를 지키던 (도)경동이가 ‘형은 최고야’라고 말해준 게 힘이 됐다”고 말했다. 캐나다와의 8강전에서 부진하다 4강 프랑스전에서 180도 달라진 모습을 보여줬던 구본길도 “8강전이 끝나고 라커룸에서 (도)경동이에게 크게 혼났다. ‘형, 왜 자신감이 없냐, 자신있게 해야한다’고 화를 내더라. 약해져 있던 나는 그말을 듣고 ‘그래, 한 번 자신있게 해볼게’라고 답했다”고 일화를 들려줬다. 이에 도경동은 “한국 사브르가 강한 이유는 팀워크다. 서로 소통도 많이 한다. 선후배보다는 형 동생 사이로 친하게 다가가 편하게 할 수 있어 좋은 결과가 나왔다”라고 말했다.
2012 런던 금메달리스트 출신인 원우영 코치와 선수들 간의 원활한 소통과 용병술과 과감한 결단도 3연패의 ‘숨은 공헌’이다. 원래 8바우트에 투입이 예정되어 있던 도경동을 7바우트에 올린 것도 원 코치의 수없이 시뮬레이션을 돌려본 원 코치의 즉흥적인 결정이었다. “선수 때보다 코치로 딴 금메달이 훨씬 기쁘다”던 원 코치는 “(도)경동이 나갈 때 손가락질을 하며 본인을 믿으라고 하더라. 그걸 보고 ‘오케이, 됐다’ 싶었는데, 나가서 5-0을 해낼 때 소름이 돋았다. 미치는 줄 알았다”고 털어놨다.
사브르 대표팀은 훈련도 극한으로 끌어올렸다. 펜싱 종주국 프랑스 현지 팬들의 일방적인 응원에 대비해 박수 소리나 강한 소음을 스피커로 틀어놓고 이를 견뎌내는 훈련을 한 것. 구본길은 “국제심판을 불러 모의로 불리한 판정을 내리게 해 멘털을 흔드는 훈련까지 했다. 이런 다양한 훈련이 큰 도움이 됐다”고 설명했다.
새로 등장한 뉴페이스들의 미친 활약과 선수들 간의 원활한 소통, 극한의 상황까지 계산해 훈련하는 치밀함까지. 이래저래 사브르 대표팀의 단체전 금메달은 당연한 결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