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상대의 가장 높은 곳에 오른 임시현(21·한국체대)은 왼손의 엄지와 검지를 맞대 동그라미를 만들고 중지와 약지, 소지를 활짝 펴서 눈에 갖다 댔다. 손가락 세 개를 폈기에 ‘3관왕’이라는 의미일 것 같았지만, 아니었다.
“누군가 제게 ‘2022 항저우 아시안게임에서 3관왕을 했는데, 바로 다음 대회에서 또 3관왕을 하는 게 쉬울 것 같냐’라고 말씀을 하신 적이 있어요. 그런데 제가 해냈잖아요. 이 세리머니는 그 어려운 ‘바늘구멍을 통과했다’는 의미에요”
올림픽 금메달보다도 더 뚫기 힘들다는 국가대표 선발전을 1위로 뚫어낸 자에게 붙여지는 칭호. 에이스. 이는 허투루 붙는 게 아니었다. 여자 양궁 대표팀의 에이스 임시현이 개인전 4강과 결승에서 치러진 ‘집안 싸움’을 모두 이겨내며 개인전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여자 단체전, 혼성 단체전에 이은 또 한 번의 금메달. 에이스라는 무거운 왕관을 버틴 그에게는 ‘3관왕’이라는 더없는 영광이 함께 하게 됐다.
임시현은 3일(이하 현지시간) 프랑스 파리의 앵발리드에서 열린 2024 파리 올림픽 양궁 여자 개인전 결승에서 대표팀 막내인 남수현(19·순천시청)을 7-3(29-29 29-26 30-27 29-30 28-26)으로 물리치고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지난해 국가대표로 처음 선발되어 2022 항저우 아시안게임에서 개인전과 여자 단체전, 혼성 단체전을 싹쓸이하며 단숨에 여자 양궁 대표팀의 에이스로 떠오른 임시현은 1년도 되지 않아 치러진 올림픽 무대에서도 3관왕에 등극하며 현존하는 세계 최강의 여궁사임을 입증했다.
하계 올림픽에서 한국 선수가 단일 대회 3관왕에 오른 것은 2020 도쿄 올림픽 여자 양궁의 안산(광주은행)에 이어 두 번째다. 2020 도쿄 대회 이전까진 여자 선수가 따낼 수 있는 금메달은 개인전과 단체전 2개에 불과했지만, 2020 도쿄에서 혼성 단체전이 신설됐다. 안산이 3년 전 도쿄에서 처음 3관왕에 오른 데 이어 임시현이 두 번째로 등극한 것이다. ‘여자 양궁 에이스=3관왕’이라는 공식이 생길 판이다.
임시현은 시상식을 마치고 금메달을 목에 걸고, 은메달을 딴 남수현과 함께 믹스트존(공동취재구역)에 들어섰다. 임시현은 “여자 단체전과 혼성 단체전에서는 결과에 집중했던 것 같다. 개인전은 과정에 집중해보고 싶어 조금 더 즐겁게 경기를 했다. 그런데 결과까지 이렇게 좋게 따라와줘서 너무 감사하고 영광”이라고 소감을 밝혔다.
한국 선수끼리의 연이은 대결에 부담스러울 법 했지만, 개인전의 모토를 ‘결과보다는 과정’으로 잡은 임시현은 맞대결을 즐겼다. 임시현은 “결승전 무대에 오르기 전에도 (남)수현이랑 주먹을 맞부딪히며 올랐다”라면서 “4강과 결승에서 한국 선수들을 만날 수 있어서 오히려 과정에 집중할 수 있었다. 4강에서 (전)훈영 언니랑 붙었을 때도 누가 이겨도 한국 선수가 결승전에 가는 거니까요. 그리고 수현이랑 붙은 결승도 둘 다 메달을 이미 딴 것이니까 조금 더 재밌게 할 수 있겠다 싶었어요”라고 설명했다.
양궁 선수로서 가장 영광스러운 올림픽 3관왕까지 오른 임시현의 목표는 ‘롱런’이다. 양창훈 감독도 임시현, 남수현의 인터뷰에 앞서 취재진들에게 “시현이나 수현이가 아직 나이가 어리다. 10년, 20년 이렇게 오래오래 할 수 있는 선수들이기 되길 바란다. 둘은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선수들”이라고 바람을 전하기도 했다. 이를 전해 들은 임시현은 “양창훈 감독님께서 그렇게 가능성을 봐주셨다는 데 감사하다. 10년 이상 해보겠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임시현은 ‘롤모델’로 전날 혼성 단체전에서 금메달을 합작한 김우진(32·청주시청)을 꼽았다. 현역 최고의 궁사로 꼽히는 김우진은 2010년 처음 국가대표에 선발된 뒤 2013년을 제외하면 매년 국가대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임시현은 “우진 오빠 같은 선수가 되고 싶다. 우진 오빠의 장점이 꾸준함이라 생각하는데, 그 위치에서 꾸준할 수 있는 선수가 과연 몇이나 될까 생각했다. 계속 옆에서 보면서 많이 배우겠다”고 말했다.
양창훈 감독은 임시현의 강점 중 하나로 ‘예민하지 않은 것’이라고 꼽기도 했다. 양 감독은 “시현이가 예민하지 않으니 ‘져도 잃을 게 없다’라는 마음으로 경기에 임한다. 걱정이 크게 없는 낙천적인 성격에 꼼꼼하기도 하다. 3관왕 자격이 충분하다”라고 치켜세웠다.
양 감독의 말대로 임시현은 상대가 앞에서 10점을 쏘더라도 전혀 의식하지 않고 자신만의 활쏘기에 집중한다. 상대가 7~8점으로 다소 빗나가게 쏘면 사실상 진다고 봐야한다. 임시현은 그런 승부처때마다 어김없이 10점에 화살을 적중시킨다. 이에 대해 임시현은 “열심히 준비했는데, 빨리 떨어지면 너무 아쉬우니까요. 그래서 승부처에 더 악착같이 쏘는 게 아닐까 싶어요”라고 말하며 웃었다.
임시현은 파리에서 모든 일정을 마쳤다. 문화와 예술의 도시인 파리인 만큼 유명한 명소나 박물관 등을 가보고 싶을 법 하지만, 임시현의 첫 번째 버킷리스트는 잠, 그리고 휴식이었다. 임시현은 “올림픽을 준비하는 동안 하루에 많을 때는 600발씩 화살을 쐈어요. 이제 다 끝났으니 잠을 좀 자고 푹 쉬고 싶어요”라고 버킷리스트를 공개했다.
첫 올림픽에서 금메달 3개를 따낸 임시현은 2028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 출전해 금메달 1개를 따내면 전설적인 ‘신궁’인 김수녕(금메달 4개)과 동률을 이룰 수 있다. 2개를 따내면 김수녕을 넘어 역대 여자 양궁 최다 금메달 보유자가 된다. 하지만 임시현은 4년 뒤 미래를 아직 생각하고 싶지는 않단다. 임시현은 “다음 올림픽은 아직 4년이나 남았잖아요. 저는 지금, 현재를 조금 더 즐겨보고 싶어요”라고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