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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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왕설래] 어느 외교관의 ‘병상 면직’

서울 광화문 외교부 청사 2층에는 순직자 추모 공간이 있다. 역대 장관들이 취임 후 가장 먼저 찾아 고개 숙여 예의를 갖춘 곳이다. 외교부는 “우리 국민과 재외동포를 보호해야 하는 험지나 외교 현장 등에서 헌신하다 스러져 간 외교관들의 이름이 하나하나 기록돼 있다”고 장소의 의미를 설명한다. 명단에 적힌 순직자가 40명도 넘는다니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길 없다.

가장 대표적인 순직자로 이범석 전 외교부 장관과 이계철 전 주버마(현 미얀마) 대사를 꼽을 수 있다. 이들은 1983년 10월9일 버마 아웅산 국립묘지를 방문한 당시 전두환 대통령 일행을 노린 북한 공작원들의 폭탄 테러로 목숨을 잃었다. 외교관은 본인만 위험에 노출되지 않는다. 1970년대 아프리카 험지 대사관에서 근무한 어느 전직 대사는 어린 아들을 풍토병으로 잃는 참척을 겪었다. 다른 부처에 들어가서 국내 근무만 했더라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니 외교관이 된 것을 후회했을 법하다.

외교관에게 대통령 해외 순방이나 국제회의 참석은 여간 힘든 행사가 아니다. 1980년대 주미 대사관 참사관으로 일하며 우리 대통령의 방미를 담당한 전직 외교부 고위 관계자는 훗날 회고록에서 “어찌나 바쁘던지 몸이 한 개만 더 있으면 싶었다”고 회상했다. 외교가에는 ‘실패한 정상회담은 없다’라는 말이 있다. 정상들이 활짝 웃으면서 만나기 전까지 실무자들 간에 피 말리는 협상과 조율이 있기에 가능하다.

엊그제 김은영(54) 전 외교부 남아시아·태평양국장이 면직 형태로 공직을 떠났다. 그는 2018년 11월 당시 문재인 대통령의 동남아국가연합(ASEAN·아세안) 및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에이펙) 정상회의 참석을 수행하던 중 뇌출혈로 쓰러졌다. 그 직전엔 영부인 김정숙 여사의 인도 방문 업무를 맡았다니 과로 탓일 것이다. 의식 불명에선 벗어났지만 아직도 24시간 요양보호사 도움이 필요하다. 그간 공무상 질병 휴직 상태였는데 공무원 인사 규정상 더는 연장할 수 없다고 한다. 동료들 성금과 함께 윤석열 대통령의 위로전과 위로금이 김 전 국장 가족에게 전달됐다. 세계 곳곳에서 분투하는 외교관들의 건강과 안녕을 기원한다.


김태훈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