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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첩보망 무너졌는데 수뇌부는 고소전… 흔들리는 국가 안위 [심층기획]

대한민국 ‘정보 안보’ 비상

신상 노출 블랙요원들 귀국길
체계적 철수 실패 땐 추가 유출 위험
軍 “사건 돌발 노출로 배후 추적 난항”
정보 넘긴 군무원 ‘간첩죄’ 적용 유력

휴민트 마비에도 정보사 집안싸움만
사령관·여단장 정면충돌… 하극상 논란
고소장에 군 기밀 암호명 버젓이 노출
고강도 쇄신… 사령관 직무배제 검토

대북 첩보 활동의 핵심 기관인 국군정보사령부(정보사)가 만신창이가 됐다. 신분을 숨기고 활동하는 해외 ‘블랙 요원’의 신상정보 유출로 대북정보 라인에 경고등이 켜졌다. 또 사령관(소장)과 여단장(준장) 간 볼썽사나운 고소전에 하극상 논란이 불거지고, 이 과정에서 민감한 작전 정보가 여과 없이 노출됐다. 특히 유출자 색출을 위한 정보사 전 직원들의 통화목록 제출 지시로 내부 반발도 확산하고 있다.

 

기밀 유출 사건을 수사 중인 국군방첩사령부(방첩사)는 군무원 A씨를 지난달 30일 군사기밀보호법 위반 등 혐의로 구속한 뒤 간첩죄 적용을 유력하게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7일 알려졌다. 이르면 8일 기소 의견으로 군검찰에 송치할 예정이다. 방첩사가 A씨와 북한의 관련성을 파악한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신분을 숨기고 해외에서 활동 중인 국군정보사령부 소속 '블랙 요원'의 신상을 유출한 혐의를 받고 있는 군무원 A씨에 대한 군사기밀보호법 위반 혐의를 수사 중인 국군방첩사령부 본관 건물 모습. 방첩사 제공

◆정보라인에 치명타… 파장 확산 우려

 

“정보사도 국가정보원(국정원)도 방첩사도 난리다. 휴민트가 깨진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국가 정보라인 사정에 밝은 한 정부 관계자가 내뱉은 말이다. 정보 활동의 핵심은 흩어진 정보를 서로 다른 소스로 체크하며 하나의 스토리로 만들어 상대방의 움직임을 예측하거나 확인하는 것이다.

 

통상적으로 통신·전자 신호를 수집하는 신호정보(SIGINT·시긴트)와 정찰위성을 통한 영상정보(IMINT·이민트)로 확보한 조각 정보들로 북한 내부 사정을 파악하고 인간정보(HUMINT·휴민트)를 통해 보완하는 과정을 거친다. 그만큼 대북 첩보활동의 첨병인 휴민트가 흔들리는 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라는 지적이 정보사 안팎에서 나오고 있다.

 

A씨는 해킹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설득력이 떨어진다. 노트북에 기밀을 담은 뒤 해커가 접근하게 길을 열어줬을 가능성도 있다. 정보사는 국회 정보위원회에서 이번 기밀 유출이 해킹에 의한 것이 아니라고 밝힌 바 있다. A씨가 기밀을 유출한 이유에 대해 사건 초기 군 안팎에선 금전 문제가 거론됐지만, 수사 당국에서는 이 같은 가능성은 작게 보는 것으로 알려졌다. 방첩사는 A씨의 경제 상황뿐만 아니라 주변 인물에 대한 수사를 통해 원인 파악에도 주력하고 있다. 특히 간첩죄 적용은 북한과의 연계성이 명백히 드러나야 하는 만큼 기밀 유출 동기와 과정 등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사건이 갑작스레 노출되면서 배후를 밝혀내는 등 추가 수사가 어려워졌다는 지적이 나온다. 정보 소식통은 “배후가 있었어도 사건이 알려지자마자 흔적을 지웠을 것”이라며 “재발방지 차원에서 A씨에 대한 수사와 별도로 사건이 외부에 공개된 경위 등도 함께 살펴보는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이와 관련해 정보사는 부대 소속 전 인원에게 휴대전화와 통화목록 등을 제출하라고 한 것으로 알려졌다.

 

2·3급 기밀 유출 파장은 상당 기간 미칠 가능성이 크다. 외국에 있던 일부 요원은 활동을 중단하고 급히 귀국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 중에는 현지 자산을 미처 정리하지 못한 채 철수한 경우도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체계적인 철수를 하지 못하면, 정보의 추가 유출 위험도 커진다. 베트남 전쟁 후반 미국 국가안보국(NSA)은 전황이 다급해지면서 남베트남에 있던 전자전 장비와 감청장비, 운용교범, 암호체계 등을 회수·파기하지 못한 채 철수했다. 이 자료들은 북베트남군을 거쳐 옛소련에 넘어갔다. NSA 역사상 가장 큰 정보 실패 중 하나로 꼽힌다. 이번 사건에서도 뜻하지 않게 정보가 추가 유출될 가능성이 제기되는 대목이다. 이를 토대로 현지 사법기관이 추적에 나설 경우 폐쇄회로(CC)TV 등을 통해 동선과 신원 정보가 드러날 우려도 있다.

 

신분이 노출된 요원은 재파견도 불가능하다. 요원이 현지에 없다면 기존에 진행하던 공작 또는 정보수집활동은 지속되기가 어렵다. 이는 인적 정보 공백으로 이어진다. 정보 활동 경험이 있는 한 예비역 장교는 “성공하든 실패하든 공작을 해야 정보가 모인다”며 “공작을 못 한다면 얻을 정보도 없다”고 설명했다.

◆기강 무너진 정보사… 대대적 혁신 필요

 

정보사 사령관과 대북 인적 정보를 책임지고 있는 여단장 간 정면충돌과 진흙탕 고소전은 충격적이다. 수도권에 있는 영외 비밀 사무실의 사용 여부를 놓고 충돌을 빚었고, 이 과정에서 결재판을 던지는 등 인격 모욕적인 폭언이 오고 가면서 사건이 커졌다는 후문이다.

 

상대적으로 정보사 경험이 많고 육군사관학교 선배인 여단장이 후배이지만 상관인 사령관을 무시했다는 지적도 있고, 상황을 잘 모르는 사령관이 자존심만 앞세웠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상명하복을 중시하는 군대이자 비밀결사와 같은 정보기관에서 하극상 논란과 비방전이 발생한 것은 군 기강이 무너졌다는 비판을 받기에 충분하다.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에 전시된 국군정보사령부 깃발 모습. 연합뉴스

특히 이 과정에서 존재조차 공개되지 않던 정보사의 기획 공작명(광개토 사업)과 준비 및 보고 과정, 안가의 위치, 수뇌부 간 갈등이 고소장 등을 통해 낱낱이 드러났다. 광개토 사업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고소장에 나오지는 않지만, 한반도 북쪽으로 영토를 확장했던 광개토대왕 업적과 정보사 업무 성격에 비춰 북한과 인접한 중국 동북 지방을 배경으로 하는 대북 공작일 가능성이 크다는 게 전문가들의 시각이다. 해당 지역에서의 후속 공작 또는 정보수집이 어려워질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는 대목이다.

 

총체적 난국 상황에서 정보 공백 방지, 철수 요원에 대한 처우 등 과제까지 겹친 정보사의 수뇌부가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을지 우려가 나오고 있다. 조직 관리 부실 책임과 더불어 내부 기밀과 치부가 모두 드러난 정보사를 쇄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는 이유다. 군 당국이 정보사 수뇌부에 대한 인사조치를 한다는 말이 나오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국방부는 사령관에 대한 직무배제를 검토 중이다. 앞서 여단장에 대해선 이미 직무배제 조치했다. 군 관계자는 “수습할 일은 많은데 리더십이 발휘되지 않으면, 조직원은 각자도생하고, 조직의 단결력과 능력은 약해진다”며 “(정보사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박수찬 기자 psc@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