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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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르포] 153년 전 보불전쟁에서 패했던 프랑스, 2024년 파리에서의 ‘농구 보불전쟁’은 승리하며 결승 진출 성공

유럽 국가들 중 최대 라이벌을 꼽으라면 어디일까. 백년 전쟁을 치른 데다 제국주의 시대에 전 세계를 누리며 식민지 쟁탈전을 벌인 영국과 프랑스를 꼽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그렇다면 ‘유럽 대륙’ 내의 최대 라이벌은? EU를 이끄는 두 국가인 프랑스와 독일일 것이다.

Mathias Lessort (26), of France celebrates a basket against Germany during a men's semifinals basketball game at Bercy Arena at the 2024 Summer Olympics, Thursday, Aug. 8, 2024, in Paris, France. (AP Photo/Mark J. Terrill)

지금이야 독일이 프랑스보다 세계 국내총생산(GDP) 순위도 4위로 7위인 프랑스보다 세 계단 높지만, 지금으로부터 200년 전만 해도 독일은 프랑스의 ‘밥’이었다. 프랑스는 일찌감치 중앙집권국가를 이루며 유럽 대륙의 맹주 역할을 했다. 나폴레옹 시대에는 전 유럽을 상대로 전쟁을 펼칠 정도였다. 반면 독일은 통일 국가를 갖지 못했다. 중세 이후 수백여개의 영주국으로 분열되어 국력이 분산됐다. 독일이 통일되기 전만 해도 프랑스의 유럽 대륙 내 최대 라이벌은 합스부르크 가문이 이끄는 오스트리아제국이었다.

 

유럽 내에서 쩌리 취급만 받던 독일은 ‘철혈재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이끄는 북동쪽에 있던 독일 내 연방국 중 하나인 프로이센이 힘을 키워 통일 전쟁을 일으켰고, 1871년에야 독일 제국이 성립됐다.

 

프로이센이 독일을 통일하는 데 마지막 걸림돌은 나폴레옹 3세가 이끄는 프랑스 제국이었다. 비스마르크의 프로이센은 1870~71년에 걸쳐 프랑스 제국과 전쟁을 했고, 승리했다. 한국에서 세계사 시간에 ‘보불전쟁’이라 배운 전쟁이다. 프로이센을 한자로 음차한 게 ‘보로서(普魯西), 프랑스를 한자로 음차해 부른 이름이 ’불란서‘(佛蘭西)인 것에서 두 국가의 앞글자를 떼어 붙인 이름이다. 이 전쟁의 승리를 통해 프로이센은 독일 연방 내 모든 제후국들이 통합되어 독일 제국이 건국될 수 있었다.

 

보불전쟁 승리 이후 독일이 일방적으로 프랑스를 두들기는 관계가 성립됐다. 1,2차 세계대전에서도 프랑스가 최종 승리자가 되긴 했지만, 전쟁을 일으킨 독일은 전쟁 중에는 프랑스 국토를 유린했다. 특히 나치독일의 프랑스에 대한 수탈과 억압은 굉장히 심했다.

 

이후 프랑스와 독일의 관계는 유럽 대륙을 이끄는 수장 국가로서 우호적으로 변했지만, 두 국가가 스포츠 대항전에서 맞붙으면 투쟁심은 매우 강해진다. 여전히 서로를 앙숙으로 바라보는 듯 하다.

스포츠 기사에 두 국가의 역사를 이렇게 장황하게 설명한 이유가 있다. 8일(현지시간) 프랑스 파리의 베르시 아레나에서는 프랑스와 독일의 2024 파리 올림픽 남자 농구 준결승이 펼쳐졌다. 개최국인 프랑스의 팬들이 압도적으로 많았지만, 독일의 삼색기도 눈에 띌 만큼 많았다.

 

양국의 국민들의 뜨거운 응원전만큼이나 경기도 치열했다. 독일 국가대표 유니폼만 입으면 크리스 폴이 빙의되어 최고의 포인트 가드로 변하는 데니스 슈로더(브루클린 네츠)의 공수 조율 아래 프란츠-모리츠 바그너 형제(올랜도 매직),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는 마당쇠 유형의 빅맨 대니얼 타이스(뉴올리언스 펠리컨스)까지 짜임새 있는 라인업을 구축한 독일이 경기 초반 앞서 나가는 모양새였다. 독일은 이 선수들을 중심으로 나선 지난해 FIBA 농구 월드컵에서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대회 MVP는 슈로더였다.

 

조별예선에서도 프랑스를 85-71로 대파했던 독일이 전반 내내 시종일관 앞서나갔다. 독일의 완승으로 또 다시 끝나는 듯 했던 경기는 2쿼터 종료를 앞두고 프랑스가 동점을 만들면서 양상이 변했다. 프랑스 추격전의 중심은 역시 ’신인류‘ 빅터 웸반야마(샌안토니오 스퍼스)가 있었다. 224cm의 압도적인 신장을 앞세워 프랑스 페인트존을 사수함과 동시에 공격에서도 내외곽을 오가던 웸반야마는 2쿼터 종료 33초 전 앤드류 알비시의 어시스트를 받아 페인트존 공격을 성공시키며 33-33 동점을 만들었다. 베르시 아레나가 떠나갈 듯한 프랑스 홈팬들의 환호와 함성, 박수가 웸반야마에게 쏠렸다.

 

이후 두 팀의 공격이 무위에 그치면서 전반은 33-33으로 끝났다. 프랑스의 에이스는 아이재아 코르디니에였다. 전반에 18분43초를 뛰면서 11득점 3리바운드 2스틸로 맹활약했다. 웸반야마는 전반 7득점 5리바운드 1블록슛을 기록했다. 독일에서는 슈로더와 프란츠 바그너가 각각 7점씩을 올리며 최고득점자에 이름을 올렸다.

Evan Fournier (10), of France celebrates a basket against Germany during a men's semifinals basketball game at Bercy Arena at the 2024 Summer Olympics, Thursday, Aug. 8, 2024, in Paris, France. (AP Photo/Mark J. Terrill)

하프타임 때 만난 프랑스인들은 “절대 독일에게 질 수 없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농구 준결승을 보기 위해 마르세유에서 왔다는 에밀씨는 “팀의 짜임새가 독일이 더 좋은 것은 맞다. 그러나 우리에겐 웸반야마가 있다. 그가 우리 프랑스를 결승으로 인도해줄 것이다. 파리에서 독일에게는 절대 질 수 없다”라고 말했다. 파리 시민 펠릭스씨는 “우리는 웸반야마만 있는 게 아니다. 바툼도 있고, 코르디니에, 야부셀레도 있다. 미국에는 질 수 있어도 독일에게 농구는 질 수 없다”고 결사항전의 의지를 내비쳤다.

 

후반 첫 득점은 다재다능한 포워드 니콜라스 바툼이 책임졌다. 포스트업을 치던 구에르손 야부셀레의 패스를 건네받은 바툼은 깨끗한 3점슛을 성공시켰다. 야부셀레는 이후 러닝 덩크까지 성공시키며 홈팬들의 찬사를 한 몸에 받았다.

 

후반 초반은 야부셀레의 원맨쇼였다. 42-42에서 공격 리바운드 후 풋백 득점을 성공시키는 과정에서 앤드원까지 얻어냈다. 45-42로 프랑스가 달아난 상황에서 데니스 슈로더의 속공 시도를 바툼이 블록슛으로 쳐내자 베르시 아레나는 떠나갈 듯했다. 이에 지고만 있을 독일이 아니었다. 에이스 슈로더의 3점슛이 곧바로 터지며 45-45 동점을 만들면서 경기는 더욱 미궁 속으로 빠져들었다.

 

바툼의 앤드원 플레이로 다시 프랑스가 48-45로 앞서나가는 상황. 슈로더가 프랑스 페인트존을 돌파해 레이업 찬스를 만들었다. 그러나 슈로더의 뒤를 따라온 웸반야마가 슈로더의 레이업 시도를 원천차단해버렸다. 웸반야마는 점프를 거의 하지도 않았다. ‘신인류’만이 할 수 있는 플레이였다.

Dennis Schroder (17), of Germany has his shot blocked by Victor Wembanyama (32), of France during a men's semifinals basketball game at Bercy Arena at the 2024 Summer Olympics, Thursday, Aug. 8, 2024, in Paris, France. (AP Photo/Mark J. Terrill)

이후 양팀은 3점차 이상의 리드를 허용하지 않는 초근접전을 펼쳤다. 독일 에이스 슈로더는 상대 수비가 붙으면 돌파했다. 웸반야마의 존재를 의식해 페인트존 진입 전에 플로터를 던져 성공시키는 등 독일 공격을 진두지휘했다. 웸반야마는 포스트업 플레이를 시도할 때 상대 수비의 더블팀을 이용해 수비가 빈 곳에 있는 동료에게 패스를 건네 쉬운 득점을 도왔다.

 

3점차 이하의 승부를 깨뜨린 것은 프랑스의 에반 포니에(디트로이트 피스톤스)였다. 프랑스 대표팀의 공격 전술을 저격하며 “우리의 농구는 구식이다. 오늘날 농구는 최고의 수비는 공격이다”라고 말했던 포니에는 3쿼터 종료 1분42초 전 깔끔한 3점포를 꽂아넣으면서 프랑스가 56-50으로 앞서나갔다. 이후 두 팀의 공격은 무위에 그치면서 3쿼터는 그대로 56-50, 프랑스의 리드로 끝났다.

 

4쿼터 첫 득점도 프랑스의 차지였다. 프랭크 닐리카나가 공격 리바운드 후 풋백 득점을 성공시켰다. 8점차로 열세에 놓인 독일은 아이작 봉가의 3점으로 반전의 계기를 마련했다.

Victor Wembanyama (32), of France celebrates a basket against Germany during a men's semifinals basketball game at Bercy Arena at the 2024 Summer Olympics, Thursday, Aug. 8, 2024, in Paris, France. (AP Photo/Mark J. Terrill)

웸반야마도 점수 쟁탈전에 가세했다. 한 차례 3점슛이 실패했으나 동료의 공격 리바운드로 다시 한번 웸반야마에게 3점슛 기회가 왔고, 웸반야마는 주저않고 다시 던져 클린샷을 성공시켰다. 이어 프랑스의 수비가 성공한 뒤 마티아스 레조트의 인사이드 공격이 성공했고, 슈로더의 3점슛 실패 후 닐리카나의 3점슛이 터지면서 프랑스는 66-53까지 앞서나가며 승기를 제대로 잡았다. 독일이 타임아웃을 부르자 베르시 아레나의 프랑스 관중들은 파도타기 응원까지 선보이며 승리를 확신하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독일도 이대로 당할 팀은 아니었다. 추격전을 개시하며 종료 1분40초를 남겼을 때 69-63까지 따라붙었다. 종료 38.6초 전, 70-65에서 슈로더의 어시스트를 받은 프란츠 바그너의 3점슛이 깨끗하게 림을 가르며 70-68, 2점차까지 따라붙었다. 단숨에 승부의 향방은 오리무중이 됐다.

 

이후 프랑스의 공격은 3점 라인에서 패스를 돌린 끝에 바툼이 3점슛을 던졌으나 빗나갔다. 그러나 경합 끝에 수비 리바운드를 따낸 프란츠 바그너가 상대와 몸싸움 끝에 공을 놓쳤다. 파울로 볼 수도 있었지만, 경기장이 어디인가. 바로 프랑스의 홈인 베르시 아레나. 홈콜에 의해 다시 프랑스의 공이 선언됐다.

Nando De Colo (12), of France goes after a loose ball with Franz Wagner (9), of Germany and Daniel Theis (10), of Germany during a men's semifinal basketball game at Bercy Arena at the 2024 Summer Olympics, Thursday, Aug. 8, 2024, in Paris, France. (Aris Messinis/Pool Photo via AP)

12초를 남기고 2점 뒤진 상태에서 공격권을 잃은 독일은 파울작전에 돌입할 수 밖에 없었다. 10.9초를 남기고 웸반야마에게 파울을 했다. 웸반야마가 2개를 다 넣으면 4점차로 벌리며 절대적으로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었지만, 1구 실패. 프랑스 팬들은 “웸비~웸비”를 열창했고, 2구를 넣으며 71-68, 3점차를 만들었다.

 

10.9초를 남기고 3점차, 독일이 충분히 동점을 만들 수 있는 시간이었다. 독일 벤치는 당연히 타임을 불러 공격 전술을 지시했다. 3점을 허용하지 않으려는 프랑스는 역파울작전을 써서 슈로더에게 자유투 2개를 허용했다. 여기에서 슈로더의 자유투 1구가 벗어나면서 2구를 넣었지만, 71-69. 독일의 패색이 짙어지는 순간이었다.

 

파울 작전 외에 별다른 방법이 없는 독일은 또 다시 파울을 했다. 슈터는 아이재아 코디니에르. 프랑스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뛴 코디니에르는 1,2구를 모두 넣었고, 슈로더의 하프라인 근처 3점슛이 벗어났다. 73-69, 농구장에서의 ‘보불전쟁’은 프랑스의 승리였다. 예선에서의 완패를 완벽하게 갚아주는 프랑스였다. 프랑스 선수들은 승리 후 코트 위에서 춤을 추며 팬들과 기쁨을 함께 했다. 프랑스 팬들도 오랫동안 경기장을 떠나지 않으며 결승 진출을 이뤄낸 선수들의 공을 치하했다.

The French team celebrate a basket during a men's semifinals basketball game at Bercy Arena at the 2024 Summer Olympics, Thursday, Aug. 8, 2024, in Paris, France. (AP Photo/Mark J. Terrill)

프랑스는 야부셀레가 17점, 코디니에르가 16점을 넣으며 공격을 주도했고, 프랑스의 최고스타 웸반야마는 11점 7리바운드 4어시스트 3블록슛으로 다재다능함을 뽐냈다. 독일은 슈로더가 18득점으로 분전했지만, 동료들의 도움이 없는 게 아쉬웠다.


파리=남정훈 기자 che@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