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산도 서해 지키는 길쭉한 섬 장도/정겨운 포구 내려 쉬엄쉬엄 산 오르면 람사르 습지 만나/음소거한듯, 고즈넉한 무공해 정청자연 즐기며 트레킹/암태도 기동삼거리 ‘동백 파마 벽화’ ·자은도 1004뮤지엄파크 볼 것 많은 신안여행
가파른 언덕을 쉬엄쉬엄 오른다. 작은 배 하나 겨우 닿는 아담한 선착장을 뒤로하고. 마을 아낙네 모여 수다 떨듯 주황, 빨강, 파랑 지붕 얹은 작은 집들 옹기종기 모여 앉은 정겨운 포구는 욕심 없는 순박한 이의 얼굴처럼 평온하다. 고도를 높일수록 꽁꽁 숨겨놓은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내는 기다란 섬 자락. 푸른 바다에 어머니 치마폭처럼 포근하게 펼쳐진 장도의 비경을 즐기며 신비한 섬속 람사르 습지를 찾아 나선다.
◆해녀마을 장도 가는 길
전남 신안군 흑산면 장도. 홍어의 본고장 흑산도는 알아도 장도는 여행을 많이 다니는 이들도 들어 본 적이 별로 없을 것 같다. 가는 길이 아주 멀기 때문이다. 오전 7시50분. 목포연안여객선터미널을 출발한 쾌속선 뉴골드스타는 날개를 활짝 펼친 두 마리 학이 당장이라도 날아오를 것 같은 모습으로 바다를 꾸미는 목포대교를 지나 넓은 바다로 빠르게 나아간다. 마침 날이 맑아 유달산 일등바위·이등바위와 고하도, 목포해상케이블카가 그림처럼 어우러지는 풍경을 덤으로 얻는다.
이어 끝도 없이 등장하는 수많은 신안의 섬들. 바닷길을 달려보니 ‘천사섬’으로 불리는 이유를 잘 알겠다. 신안군이 공식적으로 집계한 섬만 1004개에 달하고 실제는 이보다 좀 많단다. 크고 작은 섬들이 오밀조밀 꾸미는 풍경을 즐기며 바닷길을 두 시간 달려 살짝 멀미가 시작될 때쯤, 쾌속선은 흑산항에 손님을 쏟아낸다. 하지만 여정은 끝이 아니다. 다시 작은 배로 갈아타고 30분을 달리자 그제야 이름처럼 길쭉한 장도가 신비스러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목포여객터미널에서 흑산도를 오가는 쾌속선은 하루 4차례, 흑산도에서 장도를 오가는 소형여객선은 월, 수, 금 하루 2회 운항하니 스케줄을 잘 짜야 한다.
세상의 소음을 블랙홀이 모두 빨아들였나 보다. 헤비메탈 연주를 듣다 음소거를 한 듯, 인적이 없는 작은 선착장에 내리자 고요함만 밀려온다. 오로지 들리는 것은 부두를 때리며 밀려왔다 사라지는 파도 소리뿐. 이토록 고즈넉한 이유가 있다. 면적 약 1.5㎢의 아주 작은 섬에 사는 주민은 100여명에 불과하다. 세상과 좀 멀리 떨어져 오로지 나를 마주하는 시간을 갖고 싶다면 장도가 안성맞춤이다.
목포에서 남서쪽으로 110㎞ 떨어진 장도는 남서방향으로 뻗은 모양이 길어서 긴 섬, 장도라는 이름을 얻었다. 북쪽에서부터 무인도인 외망덕도, 내망덕도, 쥐머리섬, 소장도가 이어지고 가장 남쪽에 사람이 사는 대장도로 연결된다. 조선 인조 원년(1520)에 한양 조씨 조국현이 해조류를 채취하기 위해 잠시 거주하다 풍부한 수산자원에 반해 아예 정착하면서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으로 전해진다. 실제 마을 주민 대부분이 어업에 종사하고 해녀가 많아 ‘해녀마을’로도 불린다. 돔, 우럭, 장어, 전복, 성게가 특산물이며 청정해역에서 주로 자라는 돌김, 미역, 톳 등 해조류도 풍부하다.
◆람사르 습지 품은 신비의 섬
머나먼 바닷길을 달려 장도를 찾은 것은 해발 273m 섬 정상에 무려 9만㎡에 달하는 대규모 습지가 있기 때문이다. 2003년 장도 습지가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졌고 2005년 람사르 습지로 지정됐다. 우리나라는 1997년 101번째로 람사르협약에 가입했으며 강원 인제 대암산 용늪(1997년)과 경남 창녕 우포늪(1998년)에 이어 장도가 세 번째다. 또 전남 순천만 갯벌(2006년), 전남 보성 벌교갯벌(2006년)도 람사르 습지로 등록됐다. 이 중 장도가 특별한 것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섬, 그것도 산 정상에 습지가 조성됐기 때문이다.
지붕을 알록달록한 색으로 칠한 부두의 집들을 지나 녹슨 철탑에 소박한 종이 달린 천주교 흑산성당 장도공소를 지나면 본격적으로 산행이 시작된다. 정상이 그리 높지 않고 계단이 놓였지만 경사가 워낙 가팔라 고생을 좀 해야 한다. 급한 일 하나 없으니 쉬엄쉬엄 계단을 오른다. 산 중턱쯤에 도달했을 때 뒤를 돌아보면 탄성이 저절로 터진다. 푸른 하늘과 푸른 바다 사이 길게 누운 장도의 전경이 파노라마로 펼쳐져 답답하던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다. 잠시 눈을 감고 시원한 바람에 몸을 맡기니 육지를 떠나올 때까지 끈질기게 따라다니던 자잘한 고민과 걱정거리들이 바람을 따라 훌훌 날아가 버린다.
먼 길이지만 오기 잘했다. 서쪽 홍도와 저 멀리 다물도, 동쪽 흑산도가 바다를 꾸미는 풍경을 즐기며 산을 오르다 허벅지가 찢어지는 고통이 찾아올 때쯤 전망대에 닿는다. 어른 키를 훌쩍 넘기는 조릿대 숲을 헤치며 좁은 오솔길을 통과하자 갑자기 시야가 탁 트이며 예쁜 정자가 등장한다. 그 너머로 펼쳐지는 푸른 바다는 수채화가 따로 없다.
잘 보이지 않지만 주변은 온통 습지다. 신발이 푹푹 빠질 정도로 산 정상에 물이 그득하니 반드시 트레킹화를 착용하고 산을 오르도록. 신기하다. 어떻게 산꼭대기에 이런 습지가 만들어져 있을까. 산의 지형 덕분이다. 정상이 오목해 물을 잘 담는다. 정상 중앙부 습지는 화강암, 주위를 둘러싼 산지는 규암으로 이뤄졌는데 화강암 침식이 규암보다 빨라 중앙부가 오목한 모양이 됐다. 또 주위 규암에서 침식된 모래 등이 빗물과 함께 모여 습지가 형성되는 여건이 만들어졌다. 식물이 썩으면 분해돼 사라진다. 하지만 장도 정상부 경사는 5도 미만으로 완만하고 찬 계곡물이 서서히 흘러 식물의 분해를 더디게 만든다. 이 때문에 수천년 동안 완전히 썩지 않은 식물이 쌓인 ‘이탄층’이 70∼80㎝ 깊이로 조성돼 완벽한 습지를 만들어 냈다.
사람의 발길이 드문 곳이라 훼손되지 않은 숲에는 식물 294종, 조류 94종, 포유류 7종 등 500여종이 살아간다. 특히 멸종위기종인 흰꼬리수리, 수달, 흑산도비비추, 참달팽이 등이 서식하는 생태계의 보고다. 산 정상을 돌아 마을 반대편으로 내려가는 길은 태고의 순수가 가득하다. 이름 모를 다양한 야생화도 반갑고 바다와 숲이 숨바꼭질하듯 번갈아 나타나는 풍경도 여행의 낭만을 더한다.
◆수석미술관 갈까 조개박물관 갈까
신안군에는 아름다운 해변을 무려 9개나 품은 섬, 자은도가 있다. 이름은 섬이지만 다리로 연결돼 장도처럼 힘들이지 않고 차로 가볍게 여행할 수 있다. 신안군청이 있는 압해도에서 천사대교를 건너면 암태도로 들어선다. 기동삼거리에서 길은 두 갈래로 나뉘며 왼쪽은 팔금도를 거쳐 안좌도를 지나 자라도까지 연결된다. 오른쪽 길로 접어들어 은암대교를 지나면 자은도다. 그런데 이 삼거리를 그냥 지나기 쉽지 않다. 유명한 기동삼거리 벽화를 만나기 때문이다. ‘동백 파마 벽화’로도 불리는데, 담벼락에 온화하고 밝은 미소를 띤 부부의 파마머리를 동백나무로 표현했다. 부부의 머리는 실제 담장안에서 자라는 아기동백과 자연스럽게 연결되며 재치 발랄한 작품으로 완성된다.
기동삼거리에서 20여분을 달려 자은도로 들어서면 해송숲이 아름다운 양산해변에 ‘1004 뮤지엄파크’가 펼쳐져 있다. 수석미술관, 수석정원, 세계조개박물관, 신안새우란전시관, 도서자생식물연구센터, 바다해양숲공원, 해송숲오토캠핑장으로 꾸민 해양복합문화단지다. 무엇보다 규모가 50만㎡에 달해 여유 있게 즐길 수 있다. 가장 인기 있는 공간은 수석정원. 수석미술관 앞 집채만 한 석문을 지나면 비밀의 정원이 등장한다. 노란 수련이 활짝 핀 연못을 시작으로 기암괴석, 분재, 조경수, 분수가 어우러지는 예쁜 정원이 펼쳐져 대충 찍어도 화보를 얻는다.
수석미술관도 꼭 들러봐야 한다. ‘돌속에 핀 꽃’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신기하다. 아무리 봐도 민들레꽃이 그대로 화석으로 굳어진 듯 선명하다. 용암이 흐르다 멈춘 듯한 행운석 등 세상에 둘도 없는 수석들로 즐비해 지루할 틈이 없다. 원수칠 수석미술관 관장이 50여년 동안 모은 수석 1004점을 기증해 수석미술관이 탄생했다. 세계조개박물관에선 임양수 땅끝해양자연사박물관 관장이 40여년 동안 세계 바다에서 수집한 조개와 고둥을 만난다. 환경오염의 지표가 되는 조개와 고둥의 종류 등 신안의 갯벌 이야기기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