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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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 지속가능성과의 바로미터’ 지속가능연계채권(SLB) 시장 활성화해야 [더 나은 경제, SDGs]

한국남동발전은 지난달 31일 공공기관 최초로 3년 만기 500억원 규모의 지속가능연계채권(Sustainablility-Linked Bond·SLB)을 발행했다. 발행 주관사는 KB증권, 인증기관은 나이스신용평가다.

 

공공기관으로는 최초이지만, 2022년 국내에 SLB가 도입된 뒤 세번째로 국내 시장에서 상장한 사례다.

 

지난달 25일 국제자본시장협회(ICMA) 국내 컨퍼런스에 참석한 무스타크 카파시 아시아태평양 총괄 대표와 UN SDGs 협회 강혜영 대표, 황유진 연구원(왼쪽부터).

앞서 ‘원화물’ SLB는 현대캐피탈이 작년 7월 발행한 만기 1.6년∼5년의 2200억원 규모 5건이 한국거래소에 처음 상장된 바 있다. 현대캐피탈은 지난달에도 2년 만기 1000억원 규모의 SLB를 추가 발행하는 데 성공했다.

 

이밖에 ‘외화물’로는 SK하이닉스가 2023년 1월 10억달러 규모의 SLB를 해외 시장에서 발행한 사례도 있다.

 

SLB는 ESG 채권의 한 종류다. ESG 채권은 환경, 사회적 책무, 지배구조 개선을 위한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발행하는데, 크게 조달자금 기반(Use of Proceeds·UOP)에 따라 녹색채권(Green Bond), 사회적채권(Social Bond), 지속가능채권(Sustainability Bond) 및 SLB로 분류할 수 있다.

 

SLB를 빼고 ESG 채권을 발행하기 위해서는 적격 ESG 프로젝트가 있어야 하고, 발행 자금의 목적을 명확히 하기 위해 사용처를 사전에 검토하는 인증 과정을 거쳐야 한다. 즉 조달자금의 사용처가 적격 프로젝트로 국한되는 셈이다. 특히 녹색채권은 적격 친환경 프로젝트가 없거나 비환경적 산업에 종사하는 기업이 발행하기는 매우 까다롭다.

 

이와 달리 SLB는 조달자금의 사용 범위를 특정하지 않고, 자유롭게 쓸 수 있다. 발행사가 사전에 환경, 사회 등의 분야에 대한 지속가능성과목표(SPT)를 설정하고 이를 달성하지 못하면 일정 수준의 프리미엄을 투자자에게 제공하는 형태이기 때문에 다른 ESG 채권보다 진입 문턱이 낮은 편이다. 적격 프로젝트가 없어 ESG 채권을 발행하기 힘든 기업에 새 기회가 될 수 있다.

 

기업이 지속가능성 목표를 설정하고, 이를 정해진 기간에 자발적으로 이행하기 위해 노력을 촉진시킨다는 점에서 SLB의 발행은 탄소 중립과 녹색성장을 달성하기 위한 중요한 수단이 될 수 있다. 한국남동발전이 발행한 SLB를 살펴보면 2025년 온실가스 배출량을 국가온실가스감축목표(NDC) 기준 연도인 2018년 대비 41% 이상 감축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달성하지 못하면 만기에 채권 금리 외 연 0.02%포인트에 해당하는 프리미엄을 추가 지급하도록 설계됐다.

 

SLB 시장은 개인투자자에게도 새로운 투자처가 될 수 있다. 이탈리아 석유 대기업 에니(Eni)는 지난해 세계 최초로 개인투자자가 참여할 수 있는 SLB를 밀라노 증권거래소의 채권 시장에 상장했다. 5년 만기 채권에 대해 최소 연 4.3%의 고정금리를 지급하는 이 SLB는 에니가 온실가스 감축 및 재생에너지 용량 확대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면, 만기에 지급하는 쿠폰의 금리가 건당 0.5%씩 인상되는 구조다.

 

여러 장점에도 SLB는 다른 ESG 채권에 비해 비교적 최근에 도입되었고, 아직 시장은 활성화되지 않은 상황이다. 전 세계적으로 녹색채권의 첫 발행사례가 2007년인 것에 비해 SLB는 이탈리아 에너지 그룹 에닐(Enel)이 2019년 9월 발행한 것이 최초이다.

 

ESG 채권 원칙을 제정하는 국제자본시장협회(ICMA)에 따르면 2020년 85억달러 수준이던 SLB 발행량은 2021년 973억달러로 급증했으나 2022년(704억달러)과 2023년(564억달러)에는 연달아 감소했다. 올해 들어 6월까지는 180억달러의 발행 규모를 기록하면서 2020년 이후 최저치를 기록했다.

 

국내 ESG 채권 시장에서 SLB가 차지하는 비중도 미미하다. 한국거래소 ‘ESG 채권 정보플랫폼’에 따르면 지난 9일 기준 SLB 채권 상장 잔액은 3600억원으로, 사회적채권(약 212조원)과 녹색채권(약 26조원)에 크게 못 미친다.

 

고금리 등 대외적인 여건뿐 아니라 발행사들의 불분명한 SPT 설정과 이의 달성을 둘러싼 불투명한 방안 등은 SLB 시장의 성장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꼽힌다.

 

ICMA는 지난 6월 말 SLB 관련 체크 리스트와 핵심성과지표(KPI) 레지스트리를 발표하는 등 그간 시장 활성화를 위해 노력해왔다. ICMA 옵저버인 UN SDGs 협회도 올해 ICMA SLB 워킹그룹에 참여해 KPI 레지스트리의 SDGs(지속가능발전목표) 매핑에 대한 의견을 개진하는 등 관련 노력에 동참해왔다.

 

지난해 전 세계에서 발행된 SLB 발행사의 83%는 비금융기업이었다. 하지만 국내에 상장된 SLB를 비금융기업이 발행한 사례가 전무하다는 것은 한국 시장 활성화가 더욱 필요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SLB의 목표치 설정과 평가를 위한 명확한 가이드라인 제공과 성공적인 사례 분석을 통해 유의미한 지속가능성 개선 효과를 낼 수 있도록 시장의 신뢰를 확보하고 SLB 활성화를 위해 노력할 때이다.

 

강혜영 UN SDGs 협회 대표 unsdgs@gmail.com

 

*강 대표는 현재 국제자본시장협회(ICMA) 지속가능연계채권(SLB) 실무그룹 위원이며, 대통령 직속 2050탄소중립녹색성장위원회 국제협력분과 전문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