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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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도요정’ 박혜정이 들어올린 299kg, 하늘에 계신 엄마에게 보내는 ‘편지’였다

여자 역도 대표팀의 박혜정(21·고양시청)은 2024 파리 올림픽을 앞둔 지난 4월, 너무나 큰 이별을 경험했다. 어머니가 약 8년 간의 오랜 암투병 끝에 사망한 것. 어머니와의 작별 시간이 다가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생애 첫 출전하는 올림픽을 어머니가 지켜봐주길 바랐다. “1년만 더, 몇 개월만 더”라고 기도해봤지만, 하늘은 무심했다. 박혜정의 어머니이자 육상 원반던지기 선수 출신인 남현희씨는 4월에 눈을 감핬다. 딸 박혜정이 올림픽 출전권이 걸린 2024 국제역도연맹(IWF) 태국 월드컵 출전을 약 일주일 앞둔 시점이었다. 박혜정은 장례를 다 마치고 태국으로 출국했다.

 

박혜정이 11일(현지시각) 프랑스 파리 사우스 파리 아레나6에서 열린 2024 파리 올림픽 역도 여자 81kg 이상급 경기에서 용상 2차 시기 168kg을 성공하고 있다. 뉴시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가족을 떠난 보낸 슬픔에도 박혜정은 꿋꿋했다. 4월10일 태국 푸켓에서 열린 대회 여자 87㎏ 이상급 경기에서 인상 130㎏, 용상 166㎏, 합계 296㎏을 기록해 합계 325㎏(인상 145㎏·용상 180㎏)을 든 리원원(중국)에 이은 2위로 파리 올림픽 출전권을 따냈다. 그렇게 보통 사람이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태에서도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 소중하게 따낸 올림픽행 티켓은 박혜정에게 은메달이라는 값진 결과로 이어졌다. 

 

박혜정은 11일(현지시간) 프랑스 파리의 사우스 파리 아레나6에서 열린 2024 파리 올림픽역도 여자 81㎏ 이상급 경기에서 인상 131㎏, 용상 168㎏, 합계 299㎏을 들어 은메달을 수확했다.

 

11일(현지시간) 프랑스 파리 사우스 파리 아레나에서 열린 2024 파리올림픽 역도 여자 81kg 이상급에서 은메달을 따낸 박혜정이 시상대에 올라 메달을 들어보이고 있다. 연합뉴스

박혜정이 바벨을 누구보다 높게 들어올리는 장면을 아버지와 언니는 현장을 찾아 지켜봤다. 박혜정이 더 높게, 더 높게 바벨을 들어올린 것은 하늘에 계신 어머니에게 닿을 수 있을까 하는 기대감이 아니었을까. 

 

남현희 씨가 아직 박혜정의 곁에서 함께 할 때, 박혜정에게 ‘엄마’라는 단어는 눈물 버튼이었다. 그래서 엄마 얘기가 나올 때마다 공식 언급을 피했다. 올림픽에 전념해 메달을 따면 말하겠다는 다짐을 했다.

 

11일(현지시간) 프랑스 파리 사우스 파리 아레나에서 열린 2024 파리올림픽 역도 여자 81kg 이상급에서 은메달을 따낸 박혜정이 시상식에서 눈시울을 붉히고 있다. 연합뉴

이번 파리 올림픽은 박혜정이 공식적인 자리에서 어머니 얘기를 꺼내는 자리가 됐다. 시상식 후 공동취재구역에 들어선 박혜정은 “아빠랑 언니에게 은메달을 보여주고 싶다. 그리고 한국에 가서 엄마한테 메달을 보여드릴 것”이라고 말한 뒤 “올림픽이 끝나기 전까지는 마음이 흔들릴 것 같아서 어머니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런데도 어쩔 수 없이 엄마 생각이 났다”고 털어놨다. 이어 “워밍업을 하는 도중에 문득문득 엄마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리고 시상대에 올라갔을 때 좀 울컥해서 울었는데, 고은아 이사님이 ‘왜 울어, 웃어 혜정아’라는 말을 해주셔서 다시 웃었다”라고 덧붙였다. 

 

태국 푸켓 대회 때까지만 해도 어머니를 꿈에서 보지 못했다던 박혜정은 꿈에서 어머니를 봤다고 얘기했다. 그는 “엄마가 꿈에 나와 함께 놀러 갔다. 꿈에선 너무나 즐거웠는데, 일어나니 내가 울고 있더라”고 떠올리기도 했다.

 

박혜정이 홀로 아픔을 꾹 누른 건 아니다. 박혜정은 “아버지와 언니가 옆에서 응원해줬고, 박종화 (여자 역도대표팀) 코치님과도 자주 대화했다”며 “많은 분의 지지와 응원이 힘이 됐다”고 밝혔다.

 

역도 대표 박혜정이 11일(현지시간) 프랑스 파리 아레나 파리 쉬드6에서 열린 2024파리올림픽 역도 여자 +81㎏급 경기에 출전해 용상 2차 시기 168kg을 들어올린 뒤 환호하고 있다. 파리=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박혜정의 어머니 남현희 씨는 2022년 10월 전국체전에서 고교생으로 마지막 대회를 치른 딸에게 직접 메달을 걸어준 적이 있다. 대한역도연맹은 2018년부터 전국체전과 소년체전 합계 부문 시상을 부모 또는 지도자에게 부탁한다. 박혜정은 안산공고 재학 중이던 2022년 전국체전 역도 여자 고등부 최중량급(87㎏ 이상)에서 인상 124㎏, 용상 161㎏, 합계 285㎏을 들어 3관왕에 오른 뒤 시상대 위에서 어머니와 마주 섰다.

 

남현희 씨는 박혜정에게 금메달을 걸어준 뒤 “우리 혜정이가 힘든 과정을 다 극복하고 이렇게 잘 컸다. 고마운 마음으로 혜정이에게 메달을 건넸다. 소중한 기회를 준 대한역도연맹에 정말 감사하다”고 상기된 표정으로 말했다. 당시에도 남씨는 투병 중이었지만, 딸을 보며 통증을 잊었다. 박혜정은 선부중학교에서 역도를 시작한 직후 '포스트 장미란'으로 주목받았다.

 

11일(현지시간) 프랑스 파리 사우스 파리 아레나에서 열린 2024 파리올림픽 역도 여자 81kg 이상급에 출전한 박혜정이 한국 신기록 131kg에 성공한 뒤 포효하고 있다. 연합뉴스

박혜정은 2022년 세계주니어선수권대회, 2023년 세계선수권과 항저우 아시안게임 우승을 연이어 차지하면서 파리 올림픽의 유력한 메달 후보로 손꼽혔다. 모두가 장미란의 후계자가 나왔다며 올림픽 메달만 남았다고 했다. 하지만, 남현희 씨는 딸에게 단 한 번도 '올림픽'을 화두에 올린 적이 없다. 그는 생전 인터뷰에서 “혜정이가 올림픽 메달을 따는 게 우리 혜정이를 도와준 분들께 보답하는 길이라면 올림픽 메달을 따면 좋겠다”면서도 “엄마를 위해, 가족을 위해 올림픽 메달을 따야겠다는 부담은 느끼지 않아야 한다. 올림픽 메달이 없어도, 혜정이는 우리에게 자랑스러운 딸”이라고 말한 바 있다.

 

11일(현지시간) 프랑스 파리 사우스 파리 아레나에서 열린 2024 파리올림픽 역도 여자 81kg 이상급에서 은메달을 따낸 박혜정이 시상대에 올라 메달을 목에 걸고 밝게 웃고 있다. 연합뉴스

남씨의 말대로 박혜정은 메달을 따내지 못했더라도 자랑스런 국가대표였지만, 이번 은메달로 더더욱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딸이 됐다. 그리고 그의 시선은 4년 뒤 로스앤젤레스로 향한다. 박혜정은 “리원원 선수의 몸이 좀 떨어진 모습이더라. 그래서 LA에서는 좀 불어볼만 하지 않나 싶다. 4년 뒤에는 시상대의 더 높은 곳에 서서 국위선양을 하는 걸 목표로 삼겠다”면서 “이번 올림픽에서 리원원 선수와의 격차를 10kg 정도로 줄였다. 제가 더 성장을 하면 리원원 선수보다 더 좋은 선수가 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라고 말했다. 


파리=남정훈 기자 che@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