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파리올림픽에서 한국 양궁은 다시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양궁에 걸린 5개의 종목에서 모두 금메달을 차지했고, 여자 단체전은 1988년 서울 올림픽 이래 10연패의 위업을 달성했다.
남자 양궁도 3연패를 달성하면서, 한국 궁사들의 솜씨를 유감없이 발휘한 올림픽이 되었다. 중국이 우리 민족을 지칭하는 용어였던 동이(東夷)라는 말의 ‘이(夷)’자는 활 궁(弓)이 포함된 글자로서 ‘동쪽의 활 잘 쏘는 민족’의 뜻을 포함하고 있다.
조선의 왕 중에서 특히 뛰어난 활쏘기 실력을 보인 왕은 태조 이성계였다. ‘태조실록’에는 “태조가 젊을 때 정안옹주 김씨가 담 모퉁이에 다섯 마리의 까마귀가 있음을 보고 태조에게 쏘기를 청하므로, 태조가 단 한 번 쏘니 다섯 마리 까마귀의 머리가 모두 떨어졌다”거나, “한 마리의 담비가 달려 나오므로, 태조는 급히 박두(樸頭)를 뽑아 쏘니, 맞아서 쓰러졌다. 또 담비가 달려 나오므로 쇠 화살을 뽑아 쏘니, 이에 잇달아 나왔다. 무릇 20번 쏘아 모두 이를 죽였으므로 도망하는 놈이 없었으니, 그 활 쏘는 것의 신묘함이 대개 이와 같았다”는 기록처럼 정말 믿기 힘든 활쏘기 실력을 갖추었음이 나타난다.
태조는 뛰어난 활 솜씨로 일본의 소년 장수 아지발도를 사살했고, 왜구의 격퇴에 앞장을 선 이력은 새 왕조 건설로 이어질 수 있었다. 이수광이 쓴 ‘지봉유설’에는 중국의 창, 일본의 칼과 견줄 우수한 무기로 활을 들고 있는가 하면, 중국 사람들이 우리나라에 못 미치는 것으로, 부녀의 수절, 천인의 장례와 제사, 맹인의 점치는 재주, 무사의 활 쏘는 솜씨 등 네 가지를 들고 있다.
1743년 영조는 성균관에서 왕과 신하가 함께 활쏘기 시합을 하는 의례인 대사례(大射禮)를 실시하고, 행사의 전 과정을 기록으로 남기게 했다. ‘대사례의궤’에는 당시 활쏘기에 참여한 사람들의 명단과 4발 중 맞힌 횟수와 함께 당시의 모습을 담은 그림들도 정리되어 있다. 전체 30명 중 왼손잡이가 12명(40%)으로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도 이채롭다.
문무를 겸비한 군주 정조도 활쏘기 능력이 뛰어났다. ‘정조실록’에는 정조가 창덕궁 춘당대에서 신하들과 자주 활쏘기를 했던 기록이 보이는데, 모두 50발 중 49발을 명중시켰다는 기록이 보인다. “춘당대에서 활쏘기를 하여 10순에 49발을 맞혔다. 작은 과녁을 쏘아 모두 맞혔고, 또 곤봉을 과녁 삼아 2순에 10발을 쏘아 모두 맞혔다”는 기록에서는 명사수 정조의 모습이 잘 드러난다. 50발 중 49발을 명중시킨 것을 보면 정조는 명사수임이 드러나는데, 왜 1발은 맞히지 않았던 것일까.
1792년(정조 16) 11월 16일 ‘정조실록’의 기록에는 “내가 요즈음 활쏘기에서 49발에 그치고 마는 것은 모조리 다 명중시키지 않기 위해서이다”라고 스스로 말하여, 한 발은 의도적으로 맞히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정조의 무덤을 옮기면서 쓴 기록에는 정조에 대해 “활쏘기에 있어서는 또 타고난 천분이어서 50발 중에 49발을 쏘았는데, 이때 왕은 이르기를, ‘무엇이든지 가득 차면 못 쓰는 것이다’라 했다”는 내용이 보인다. 천부적인 활쏘기 솜씨를 보이면서 1발을 맞히지 않은 여유까지 보였던 정조, 아마도 올림픽 금메달이 걸려 있었다면 정조는 1발의 화살도 양보하지는 않을 것이다.
신병주 건국대 교수·사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