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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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경제 못 살린 혁신도시… “메가시티로 전략 바꿔야” [연중기획-소멸위기 대한민국, 미래전략 세우자]

한계 드러낸 ‘중소 거점식 균형발전’

공공기관 옮겨갔지만 주말이면 ‘텅텅’
경제적 파급효과 기대수준 이하 평가

‘2차 지방 이전’ 앞두고 유치경쟁 과열
전국 곳곳서 ‘집안싸움’… 후유증 우려

수도권 같은 ‘광역경제권’ 구축 바람직
행정통합 넘어 거점대학 육성 등 필요
#1.대전 출신 김모(31·여)씨는 지난해 말 서울의 한 공공기관에 ‘늦깎이 수습사원’으로 입사했다. 이번이 두 번째 직장이다. 대학생 시절부터 공공기관 입사를 꿈꿔 대학 졸업 직후에는 처음 전남 나주혁신도시에 있는 공공기관에 들어갔다. 김씨는 “당시 나주에 영화관이 없어 인근 지역까지 가야 할 정도로 문화생활을 즐기기 어려웠다”며 “서울이나 다른 지역 출장도 너무 잦아 체력적으로도 많이 힘들었다”고 털어놨다. 3년여를 다니다 고향 대전의 연구원으로 발령이 나면서 상황이 조금 나아졌으나, 여전히 대학생 때 누린 서울 생활과는 차이가 컸다고 했다. A씨는 “입사 동기 중 전남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나, 거기(나주)서 결혼해 정착한 사람 몇몇 빼고는 거의 퇴사하거나 직장을 옮겼다”고 아쉬워했다.

#2.올해 10년차에 접어든 경북 김천혁신도시 역시 상황은 마찬가지. 2014년 기반공사 이후 한국도로공사와 한국전력기술 등 12개 공공기관이 차례로 입주했으나, 지역에 대한 경제적 파급 효과는 기대치 이하라는 평가다. 입주 기업 수도 적고, 그나마도 절반 가까이가 원래부터 경북지역에 있던 기업이 이주한 것으로 집계됐다. 집합상가 공실률이 40%를 넘어서는 등 도시 곳곳이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다. 이곳에서 음식점을 운영하는 40대 김모(여)씨는 “평일에 겨우 배달 몇 건만 있고 주말엔 아예 주문이 없는 날도 있다”며 “일주일에 하루만 쉬고 일을 해도 200만원 남짓 버는데 차라리 아르바이트를 뛰는 게 나을 지경”이라고 푸념했다.


인구 감소로 인한 지역 소멸 위기를 극복하고자 정부가 실시한 공공기관 지방 이전 사업이 지역 발전을 제대로 견인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지방으로 이전한 정부 부처나 공기업 직원 중 상당수가 주말이면 서울 등 타 지역으로 향해 지역 경제는 공동화(空洞化)되고, 이직을 택하거나 그만두는 경우도 적지 않다. 기관 이전을 둘러싼 찬반 갈등 등 지역의 사회적 비용 역시 만만찮다.

정부가 추진 중인 2차 공공기관 지방 이전을 놓고도 지역의 유치 경쟁이 격렬하게 진행되면서 벌써부터 후유증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단순히 공공기관을 전국에 흩뿌려 놓는 식의 균형발전 전략이 인구유입과 경제활성화를 도모하겠다는 당초의 지역발전은 물론 나라 전체의 발전대계(大計)를 위협하고 있다. 일각에서 중소(中小) 거점식 균형발전 전략에서 탈피해 광역거점 개발과 행정구역 개편을 통한 메가시티(Megacity) 발전 전략에 집중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배경이다.

전북 전주혁신도시

◆기존 혁신도시전략 이미 한계 노출

12일 정부와 각 지방자치단체에 따르면 전국 혁신도시로 이전한 공공기관은 강원 원주혁신도시 12개, 충북 진천·음성혁신도시 11개, 전북 전주·완주혁신도시 12개, 전남 나주혁신도시 16개, 대구 신서혁신도시 10개, 경북 김천혁신도시 12개, 부산 동삼·문현·연혁·센텀혁신도시 13개, 울산 우정혁신도시 9개, 경남 진주혁신도시 11개, 제주 서귀포혁신도시 6개 등 모두 112개다. 세종으로 옮긴 19개 기관과 각지로 개별 이전한 22개 기관을 더하면 이전 공공기관은 총 153개에 달한다. 이 사업은 2005년 노무현정부 시절 계획을 수립한 지 14년 만인 2019년 완료됐다.

혁신도시가 들어선 지자체나 지역사회는 대체로 긍정적인 평가이지만 “한계가 뚜렷하다”는 부정론도 만만찮다. 길어야 10여년 된 혁신도시가 교육, 문화, 의료 등 정주(定住)인프라 측면에서 수도권과 현격한 차이를 보이면서 주말이면 도시가 텅 비는 공동화 현상이 여전하다는 것이 현재 혁신도시가 직면한 문제점을 그대로 보여준다. 전주혁신도시의 음식점 업주 이모(55·여)씨는 “일주일 꼬박 일해도 길어야 (금·토·일 빼고) 나흘 정도 장사가 되는 편”이라면서 긴 한숨을 내쉬었다.

주말 공동화 현상은 기존 원도심의 나대지를 개발한 신시가지형 개발의 경우 그나마 상황이 낫지만, 신도시형 개발은 더욱 심각하다. 김천혁신도시에서 근무하는 30대 박모씨는 “교육 여건이나 생활 인프라가 크게 개선되지 않는 이상 이곳에서 가정을 꾸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인구 유입이 혁신도시에만 국한돼 인접 시·군에 미치는 영향이 적다는 점과 이전 공공기관의 지역인재 채용을 둘러싼 논란이 뜨겁다는 점도 문제다.

충북 진천혁신도시

◆공공기관 2차 이전도 비전 없이 밥그릇 싸움

정부가 ‘혁신도시 시즌2’로도 불리는 수도권 공공기관의 2차 지방 이전을 추진하면서 각 지역의 유치전이 치열하다. 문재인정부가 포문을 연 2차 이전은 대상 기관과 이전 시기 등을 확정하지도 못한 채 좌초됐으나, 윤석열정부가 국정과제에 포함시키면서 다시 탄력이 붙었다. 대표적인 예가 산업은행 부산 이전이다. 여당인 국민의힘 부산 지역구 의원들 주도로 2022년 대통령선거 때부터 ‘뜨거운 감자’로 떠오른 산은 본사의 부산 이전은 야당과 산은 노동조합 등의 거센 반발에 가로막혀 입법이 지지부진한 상태다. 익명을 요구한 부산의 대학 교수는 “정치권과 시민단체를 제외하고는 산은 이전에 별 관심이 없거나 이전의 필요성을 잘 모르는 부산시민이 상당수”라며 “다만 ‘이전하면 좋겠지’란 막연한 생각에 찬성하는 것”이라고 했다.

공공기관 유치 경쟁이 과열돼 같은 지역 내에서 ‘집안싸움’이자 ‘입법대결’을 하는 상황도 벌어진다. 전북 인구감소 지역인 남원·장수·임실·순창을 지역구로 둔 더불어민주당 박희승 의원은 최근 2차 공공기관 지방 이전 대상지를 기존 혁신도시에서 인구감소 지역으로 확대하자는 내용의 혁신도시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반면 전북 전주갑이 지역구인 같은 당 김윤덕 의원은 전북으로 추가 이전하는 공공기관을 기존 혁신도시(전주·완주) 인근 원도심에 배치한다는 정반대의 내용을 담은 전북도특별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전북에서뿐 아니라 강원, 충북, 경북 등 전국 곳곳에서 기존 혁신도시와 다른 시·군 간의 갈등이 불거졌다.

대구 신서혁신도시

◆“광역거점 중심 개발 필요” 전략수정론 고개

지방시대를 천명한 정부는 혁신도시의 한계를 고려해 기존 공공기관 이전 전략을 손 봐야 한다는 입장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5월 취임 2주년 기자회견에서 “기대한 만큼 공공기관 이전이 지역 경제 활성화에 크게 도움되지 않았기 때문에 맞춤형 이전을 추진해야 한다”고 했다.

한국은행은 최근 공개한 ‘지역 경제 성장요인 분석과 거점도시 중심 균형발전’ 보고서에서 각종 통계지표를 제시하며 “규모의 경제, 인적자본 효과 등으로 대도시의 생산·고용 창출 효과가 더 큼에도 지방으로 이전한 수도권 공공기관이 10개 지역으로 흩어져 지역 거점 형성 등의 목표 달성이 제약돼 왔다. 지역별 거점 도시에 대규모 인프라와 지식재산 투자 등을 통해 수도권 못지않은 광역경제권을 구축해야 한다”고 밝혔다.

정부의 전폭 지원 아래 속도를 내고 있는 ‘대구·경북(TK) 통합광역단체’를 비롯해 전국 각지에서 추진 중인 메가시티(초광역권 자치단체)도 이런 인식의 연장선상에 있다. △인접 기초단체와의 도시연담화(都市連擔化: 도시가 확장하며 주변 소도시와 이어지는 현상)를 골자로 한 ‘메가 서울’ 구상 △대전·세종·충북·충남이 추진 중인 ‘충청권 특별지자체’ 설치 △한 차례 무산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불씨가 남은 ‘부·울·경(부산·울산·경남) 메가시티’ 등 행정구역 개편 논의가 곳곳에서 이뤄지고 있다. 대부분 ‘규모의 경제’를 통해 지역 발전을 견인하겠다는 목적이다.

경계해야 할 점은 ‘메가시티 논의=행정통합 논의’로 인식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메가시티 논의가 행정통합 자체를 목적으로 하면 기대하는 만큼의 사회적, 경제적 효과를 거둘 수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날카로운 경고다. 조재욱 경남대 교수(정치외교학)는 “메가시티가 된다고 곧바로 규모의 경제가 실현되는 게 아니다”라며 “지역의 인프라가 확실히 구축되고, 나름대로 우위를 가질 산업이 없으면 의미가 없다”고 말했다.

단순히 몸집만 키우는 행정구역 통합을 뛰어넘어 사회·경제적 시너지 효과를 발휘하기 위해서는 행정분관과 광역거점 산업 및 대학·연구기관의 육성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김찬동 충남대 교수(도시·자치융합학)는 “지방에도 수도권의 판교 같은 4차 산업 관련 허브나 거점이 만들어져야 인구가 수도권에만 집중되는 현상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며 “각지에서 추진 중인 메가시티는 정부가 지방에 대대적으로 권한·예산을 나눠주는 분권이 전제돼야 성공을 거둘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 교수는 그러면서 “청년들이 수도권으로만 향하는 걸 막으려면 메가시티마다 경쟁력과 잠재력을 충분히 갖춘 거점 대학을 만들 필요가 있다”며 “이 거점 대학들을 각 지역의 산업 허브와 연결하는 구조가 마련돼야 한다”고 조언했다.


김주영·이규희 기자, 김천·전주·부산=배소영·김동욱·오성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