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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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권에선 모자라고, 지방에선 넘치는 전기… 송전망 확충 시급 [100GW 시대 '뉴노멀']

‘블랙아웃’ 위기 문제점은

반도체 클러스터 등 집중된 수도권
전력자급률 0.67 그쳐… 영남 1.47
지역 간 비대칭 현상 갈수록 가속화

송전선로 구축 땐 주민들 동의 필수
경관훼손·소음 문제 등으로 반발 커
전력망 확충 특별법 국회서 계류 중
한전 56.5조+α 재원 감당도 미지수

“전원 계획을 아무리 수립해도 결국 성공 여부는 전력망 확충에 달렸다.”

제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전기본) 실무 수립을 맡았던 정동욱 총괄위원장(중앙대 에너지시스템공학부 교수)의 말이다.

인공지능(AI)의 폭발적인 성장과 데이터센터 및 반도체 클러스터 구축 등으로 급증하는 전력 수요를 달성하기 위해서 전력망 확충이 필수적이라는 인식이 담긴 발언이다. 전력망 구축 적기를 놓쳤다간 일시적인 전력 부족에 의한 ‘블랙아웃(대정전)’ 현상은 물론, 자칫 국내 산업 생태계 자체가 약화할 수도 있다는 ‘생존의 문제’ 이야기도 나오고 있다.

서울의 한 아파트 단지에서 정전이 발생한 모습. 연합뉴스

◆늘어나는 전력수요… 지역 간 비대칭 심해져

12일 한국전력과 11차 전기본 실무안에 따르면 AI 확산과 데이터센터 증설, 대규모 반도체 클러스터 등으로 인해 2038년 전력수요는 129.3기가와트(GW)로 전망됐다. 이는 2023년 대비 31GW 늘어난 수치다.

이에 따른 2038년 목표 설비는 157.8GW다. 이는 이전의 10차 전기본에서 목표한 2036년 기준 143.9GW 대비 10GW 이상 늘어난 수치다.

하지만 늘어난 전력수요에 대비한 전력망 확충계획은 제대로 이뤄질지 미지수다. 태양광 등 신재생에너지 비중은 2023년 26GW에서 2038년 115.5GW로 크게 늘어날 예정이다.

다만 신재생에너지는 전력생산이 일정하지 않고 시간대별, 계절별로 차이가 심한 간헐성 문제가 따라온다.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에너지저장시설(ESS) 등 유연한 전력망 확충이 동반돼야 한다. 즉, 전력생산도 중요하지만, 전력계통과 운영 역시 중요해지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의미한다.

게다가 국내의 경우 지역별로 전력수급 불균형이 심해지는 상황이다. 전력 계통 여건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채 발전·전력 소비시설이 들어서고, 지역별로 전력수요 폭의 차이가 크게 발생하기 때문이다.

2022년 기준 수도권의 전체 전력소비량은 214.8테라와트시(TWh)로 집계됐지만 발전량은 144.4TWh(전력자급률 0.67)에 불과했다. 반면 영남권의 전력소비량은 151.2TWh, 발전량은 222TWh, 자급률은 1.47로 비대칭 현상이 크게 나타났다. 호남권의 전력자급률도 1.12로 백분율로 치면 100%를 넘었다.

이 같은 전력수급 비대칭 현상은 더욱 가속화될 전망이다. 당장 대규모 전력을 필요로하는 반도체 클러스터가 수도권에 위치한 데다가, 수도권 인구가 늘어나면서 전력 수요도 늘어났기 때문이다. 일례로 지난해 10월 기준 전국 데이터센터에 공급한 전기량은 1931메가와트(㎿)로 집계됐는데, 이 중 72%인 1393㎿가 수도권에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전력망 확충 시급… 관련 특별법은 ‘계류 중’

이 같은 지역별 전력수급 불균형을 해결하기 위해선 전기 수요지 곳곳으로 전달할 ‘모세혈관’ 역할을 하는 전력망 확대가 필수적이다.

한전은 지난해 ‘제10차 장기송변전설비계획’을 수립해 송전선로 규모를 2023년 3만5596c-㎞에서 5만7681c-km로 늘린다는 계획이다.

다만 송전선로 구축은 선로 설치 과정에서 발생하는 경관훼손, 소음, 재산권 침해 등의 문제로 해당 지역주민의 동의가 필수적이다. 지역주민 입장에선 수도권의 전력수요 때문에 송전망을 ‘내 집’ 앞에 둬야 한다는 점에서 현재까지 한전과 갈등을 벌이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대표적으로 동해안-수도권 초고압직류송전(HVDC) 건설사업, 동해안-신가평 HVDC 건설사업 등은 줄줄이 주민 반대로 공사가 지연되고 있다.

이에 정부 주도로 국무총리실 소속 ‘전력망 확충 위원회’를 만들어 입지 선정과 사업 시행에서 민간의 참여 범위를 확대해 건설 기간을 현재보다 26개월가량 단축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전력망 확충 특별법’이 발의됐지만, 21대 국회에서 폐기된 데 이어 22대 국회에서도 계류하고 있다.

조마조마 역대급 장기 폭염이 지속한 12일 서울 중구 한국전력 서울본부에 설치된 전력수급 현황판에 이날 전국의 전력 예상 최대수요 93.6기가와트(GW), 공급능력 102.8GW가 표시되어 있다. 전력거래소에 따르면 지난 7일 오후 2∼3시 평균 전력 수요는 역대 3번째, 올 들어 최대인 100.2GW였다. 최상수 기자

게다가 한전의 전력망 확충 능력도 큰 변수다. 한전은 전력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송전망 확충에 56조5000억원을 투자한다는 계획을 세웠지만, AI 보급 확산으로 전력 수요 증가 속도가 예상보다 빨라지면서 투자자금이 ‘56조5000억원+α’까지 늘어날 것으로 전망을 바꿨다.

하지만 한전의 경우 200조원대 부채와 40조원대 누적적자로 재무위기를 겪는 만큼 전력망 확충에 제대로 나설 수 있을지도 미지수다.

최철호 전국전력산업노동조합연맹 위원장은 최근 “혈액을 공급할 혈관이 너무나도 좁고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라며 “전기요금 정상화를 통해 한국전력이 처한 재무적 위기 상황을 해소하고, 전력망 적기 확충을 가속화하기 위한 정부의 공적자금 투입, 각종 연기금을 통한 공공투자 확대 방안 등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전 관계자는 “독일의 경우 전력망 확충을 국가 필수 사업으로 명시하고 인허가 최소화와 분쟁절차를 간소화를 추진한다”며 “또한 송전선로가 들어서는 지역주민과 8주 이내에 토지보상에 합의한 경우 간소화 보상금을 추가 지급하는 등 정부 차원에서 전력망 확충을 주도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김범수 기자 sway@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