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6일 경북 안동시의 논 사이로 챙이 큰 모자를 푹 눌러쓴 안모(60대·여)씨가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한 달 뒤 벼를 수확을 앞두고 벼가 잘 자라고 있는지 살펴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논둑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는 안씨의 남편 권모(70대)씨의 표정은 어두웠다. 올해 초만 해도 20만원 대에 거래되던 쌀값이 17만원 대까지 떨어졌기 때문이다.
권씨는 “비룟값과 농약값은 배로 올랐고 인건비는 말할 것도 없는데 쌀값은 끝없이 하락하고 있다”면서 “더도 덜도 말고 지난해 정도 선에 쌀값이 매겨지기만을 바라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벼 농사 대신 다른 작목으로 바꾸려 해도 여의치가 않다”면서 “농사를 접어야 할 때가 온 게 아닌가 싶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올해 쌀값이 곤두박질치고 있다. 쌀 소비량이 줄어들면서 재고는 늘고 쌀값은 하락하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지 못해서다. 쌀값 하락세를 잡기 위해 일부 농민은 정성껏 키워온 논을 갈아엎기까지 했다. 쌀값 폭락 사태는 ‘현재진행형’이다.
세계 시장의 불황과 전쟁 등의 여파로 물가는 가파르게 치솟고 있으나 유독 쌀값만은 내림세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17일 농림축산식품부와 통계청에 따르면 산지 쌀값은 올해 초 80㎏(한 가마)에 20만원 대였으나 이달 17만원 대로 떨어졌다. 지난 5일 기준 산지 쌀값은 20㎏에 4만4619원, 한 가마는 17만8476원으로 조사됐다.
쌀값 폭락의 가장 큰 원인은 소비가 줄었기 때문이다. 지난해 통계청 조사에서 1인당 연간 쌀 소비량은 평균 56.4㎏로, 통계를 시작한 1962년 이래 가장 적었다. 하루 쌀 소비량은 154.6g으로 즉석밥 하나 보다 적은 셈이다. 30년 전인 1993년의 소비량인 110.2㎏과 비교하면 절반 수준에 불과했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면서 쌀농사를 짓는 농업인의 속은 그야말로 새까맣게 타들어 간다. ‘풍년’이 예상되는 상황에서도 웃지 못한다고 했다.
예천군에서 벼농사를 짓는 김모(50대)씨는 “올해는 벼 생육조건이 좋아 지난해보다 쌀 생산량이 늘어날 것으로 예상돼 쌀값이 더 떨어질 것 같다”며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땡볕 아래에서 일하고도 연봉이 1000만원도 안 된다”고 푸념했다. 끝없이 폭락하는 쌀값에 전국농민회총연맹 부산경남연맹은 지난 9일 의령군 지정면 마산리의 3800㎡ 논에서 자라던 푸릇푸릇한 벼를 갈아엎기도 했다.
정부는 올해 3차례 대책을 통해 15만t의 쌀을 사들이고 있지만 쌀값 하락세를 멈추지는 못했다. 여기에 농협중앙회는 1000억원을 들여 ‘쌀 소비 촉진 운동’으로 힘을 보태겠다고 밝혔지만 농업인들은 소득 변화를 체감하지 못한다는 데 입을 모았다.
농업인들은 정부가 하루빨리 쌀 추가 격리 등을 추진해 쌀값을 안정시켜야 한다는 입장이다. 현재의 하락세가 이어지면 역대 최악의 가격 폭락을 기록한 2022년보다 상황이 악화할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통계청 자료를 보면 2022년 9월25일 산지 쌀값은 한 가마에 15만5016원을 기록했다.
농식품부 관계자는 “올해는 쌀 소비 감소 폭이 예상보다 커서 판매 자체가 감소하다 보니 전반적으로 쌀값이 하락세를 보이고 있다”면서 “정부 매입과 농협 대책 추진 상황에 따른 산지 쌀값 동향을 모니터링하면서 필요시 추가 대책을 강구할 계획”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