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병상을 찾으려고 전국 병원을 헤매던 코로나 사태 때보다 더 심각하다.”
의대 증원에 반발해 전체 전공의 91%가 수련을 포기한 지 반년이 된 가운데 지방의 5년차 구급대원 A씨는 전공의 공백 여파 등으로 “전국 병원의 응급실이 환자를 가려서 받고 있다”면서, 응급환자 이송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병원에서 수년간 일한 뒤 구급대원이 된 그는 코로나 때보다 심각한 상황에 지친 나머지 이젠 구급대를 벗어나기 위해 인명구조사 자격증 공부를 하고 있다. A씨는 요즘 자신처럼 다른 길을 찾는 동료가 많다고 했다.
18일 의료계에 따르면 전공의들이 2월20일 집단이탈한 후 6개월이 되면서 전공의 의존도가 높은 과들을 중심으로 의료체계가 흔들리고 있고, 이는 응급환자를 받아 치료해야 할 응급실의 위기로 확산하고 있다. 전국 병원의 응급실이 환자를 가려 받자 응급환자가 구급차에서 내려 직접 응급실로 걸어 들어가거나 외래진료를 받아야 하는 비정상적인 상황도 연출되고 있다고 한다.
코로나 이전엔 따로 연락하지 않아도 대부분의 병원들이 응급환자를 받아줬다. 하지만 이젠 미리 접수하지 않으면 대기조차 할 수 없다. 상급종합병원을 찾는 경증환자를 줄여 중증환자 치료에 전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의사 부족 탓이다.
구급대원 B씨는 “응급실에선 응급처치만 하고 입원을 시키든 수술을 하든 아니면 다른 큰 병원으로 전원시켜든 해야 하는데, 지금은 아예 환자를 받지 않겠다고 한다”며 “정부가 이런 병원을 제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응급의학과는 원래 인기가 없는 데다 전공의 공백으로 업무 과중이 이어지면서 이젠 응급실에서의 상황 대처가 어려운 형편이다. 여기에 신경외과나 정형외과 등 특정과 의사가 없다는 이유로 병원은 응급환자를 아예 거부하고 있다. 응급처치 이후 벌어질 상황까지 우려한 조치다. 병실이 턱없이 부족했던 코로나 사태 때에도 의사들은 긴급성을 고려해 환자를 받아 치료했다. 하지만 지금은 1만2000여명의 전공의가 이탈하면서 의사가 부족해지며 응급환자 대응이 버거워진 것이다.
구급대원들이 2·3차 병원 간 업무 조율에 직접 나서는 황당한 상황도 발생하고 있다. A씨는 “교통사고로 머리를 다친 환자를 인근 2차 병원에선 뇌출혈 등을 우려해 거부하고, 3차 병원은 당장 수술이 급하지 않으니 검사라도 제대로 받은 뒤 얘기하자고 했다”며 “2차병원에 전화해 ‘검사를 마무리해 달라’고 요청했고, 3차 병원엔 ‘검사에서 수술이 필요하다고 결론나면 그땐 받아 달라’고 호소해 응급상황을 마무리한 적이 있다”고 했다.
병원에서 응급환자를 거부하면서 진료를 받기 위한 우회수단도 등장했다. 구급차로 병원까지 이동한 응급환자가 거동이 가능하면 차에서 내려 직접 응급실로 걸어 들어가(워크인)거나 아예 외래진료로 접수하는 사례가 허다하다고 한다.
환자 개인이 병원에 가면 대기가 길어도 접수가 가능하지만, 구급대가 병원 허락 없이 데려간 환자는 접수조차 해주지 않아서다. 구급대원이 응급환자를 집에 내려준 뒤 ‘병원을 직접 찾아가는 게 나을 것’이라고 조언하기도 한다.
생명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2∼3시간 장거리 이송도 잦다. 9일 밤 11시, 공주 정안휴게소에서 발생한 응급환자는 고압산소 치료가 가능한 지역 의료기관의 접수가 안 돼 인근 병원에서 기관내삽관(인튜베이션)을 한 뒤, 차로 2시간30분 거리인 인천 인하대병원으로 이송됐다. A씨는 ‘응급실 운영에 큰 차질이 없다’는 정부 발표에 대해 “위에서 잘못 알고 있는 게 너무 많다”며 “병원에서 안 받으면 진짜 답이 없다”고 우려했다.
그나마 응급실을 지켜온 의사들도 이젠 녹초가 됐다. 14일 기준, 전국 211개 수련병원 전공의 1만3531명 가운데 1216명(9.0%)만 출근 중이다. 9월 수련을 시작하는 하반기 전공의 지원서 접수가 16일 마감됐지만 지원자가 없는 병원이 허다하다. 전공의 일부가 내년 3월 상반기 수련 때 돌아온다고 해도 응급실은 6개월 더 견뎌야 한다. 정부는 공중보건의와 군의관을 투입한다지만 응급실 근무 경험이 있는 자원은 드물다.
구급대원들은 환자를 가려 받는 병원 행태를 지적하지만, 그나마 응급 현장에 남은 의사들은 사명감으로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다고 하소연한다.
한 응급의학과 교수는 “코로나 때에는 기다리면 병실이 났지만, 지금은 아무리 기다려도 다른 병원엘 가도 의사가 없다”고 했다. 그는 “응급의학과 전공의는 모두 나갔고 중한 환자는 결국 수련병원으로 전원하는데, 전공의 의존도가 높은 신경외과, 정형외과 등은 모두 무너진 상황”이라고 우려했다. 특정과는 중환자를 치료할 여력이 부족하다는 얘기다. 평소에 전공의들이 외면한 내과와 흉부외과 상황이 되레 낫다고 한다. 이 교수는 “전공의들은 착취당했다고 생각하고 지금 순순히 돌아가면 진 것 같다고 여긴다”며 “아무리 후배이지만 이번에 피부과 등에 취업한 전공의들은 의사를 포기한 것”이라고 질타했다. 그는 “부모님께 절대로 아프면 안 되는 시기라고 말씀드린다”며 “내년에 군 입대가 늘면 군의관으로 (급한 상황을) 해결할지 모르지만 앞으로 더 무너질 것이다. 당장 추석 연휴가 고비가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강원도 지역 병원의 응급의학과 교수는 “병상이나 약이 없으면 사 오면 되지만 지금은 대체할 수 없는 의사 인력이 부족한 것이라 해결할 방법이 사실상 없다”며 “소방은 이런 시스템에 적응해 초기 단계부터 경증환자는 구급차에 태우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비정상적인 응급실 상황에 가장 혼란스러운 건 환자다. 기침과 구토를 하고 열이 40도까지 오른 장모(50)씨의 초등학교 2학년 딸은 동네 소아과에서 폐렴 의심 진단을 받고, 큰 병원에 가라는 권고를 받았다. 장씨는 딸을 급히 서울의 한 대학병원 응급실로 데려갔지만 ‘소아과 의사도 응급실 자리도 없다’는 이유로 진료를 거부당했다. 119와 서울시 민원콜센터에 전화했더니 해당 대학병원을 다시 안내하는 상황에 장씨는 어이가 없었다. 장씨의 아이는 집 근처 2차병원에서도 소아과 의사 부재를 이유로 진료를 거부당했고, 응급의학과 의사가 있는 다른 2차병원에 운좋게 입원한 뒤 6일 만에 퇴원했다. 장씨는 “요즘 폐렴이 유행인데 아이가 병원을 오가며 너무 힘들어하는 걸 보니 화가 치밀어올랐다”고 했다.
응급실 상황은 지방이 수도권보다 더 심각하다. 충북대병원은 최근 응급의학과 전문의 결원을 메울 군의관조차 없어서 응급실을 24시간 유지하기 힘든 상황에 처했다. 응급실 전담전문의 10명 중 2명이 병가·휴직했는데 ‘백업’할 의사가 없다.
속초의료원은 응급의학과 전문의 5명 중 2명이 퇴사하면서 일시적으로 운영이 중단됐고, 충남대병원도 전문의 14명 중 3명이 사직해 목요일엔 축소 운영하고 있다. 순천향대 천안병원은 지난달 응급의학과 전문의 8명 중 4명이 사직하면서 하루 동안 응급실 문을 닫았다. 이 병원은 전국 최초로 소아 전문 응급의료센터의 문을 열었지만 마지막 남은 소아과 전문의가 5월에 병원을 떠나면서 16세 미만 중증 질환자를 받지 못하고 있다.
응급실이 일시적으로 문을 닫으면서 응급환자들은 개인병원을 찾거나 관외 장거리 이송돼거나 외래진료로 내원해야 하는 상황이다. 상급종합병원이 한 곳도 없는 경북의 한 병원 관계자는 “응급환자가 발생하면 응급실을 운영하는 도시로 환자를 보낼 수밖에 없는데, 최근 의료 인력 부족 현상이 심각한 것 같다”며 “전에는 환자를 태우고 곧장 응급실로 향했는데 요즘은 물어보고 환자를 옮겨야 한다”고 한탄했다.
정부는 “대학병원 등에 전문의가 부족해 제때 진료가 안 되는 현실은 그간 누적된 구조적 문제 때문이며, 이를 해결하고자 하는 것이 의대정원 증원과 의료전달체계 개선 등 의료개혁을 추진하는 이유”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