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를 앞두고 인테리어 정보를 모으는 중이다. 이사 갈 집이 구축인지라 A에서 Z까지 뜯어고치겠다는 원대한 꿈을 품었는데, 인테리어업체에 작업 전반을 일임하는 일명 ‘턴키 시공’이 아니라, 내가 감독관이 돼서 주도하는 ‘반셀프 인테리어’를 계획한 터라 챙길 게 많다. 실링팬(천장형 선풍기) 고르고, 무몰딩 도배 선택하고, 대면형 주방 알아보고… 그러다 다운라이트(천장 매립 조명)까지 왔을 때 ‘현타’가 왔다. 내 취향에 의해서가 아니라, 남들이 좋다고 하는 것들만 잔뜩 ‘즐겨찾기’하는 나를 발견해서다. 내가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지?
문제를 자각하고 인터넷 카페와 소셜미디어에서 인기 끌고 있는 인테리어 사진들을 다시 살펴보다가 깨달았다. ‘진짜 취향으로 꾸민 집들은 많지 않구나.’ 약속이라도 한 듯 대부분 하얗고, 실링팬이 돌아가고, 천장은 조명 매립으로 구멍이 숭숭 뚫려 있다. 독특한 가구 배치도 찾아보기 힘들다. 대다수가 유행에 동참한 것이다. 물론 우리나라 아파트·빌라는 구조가 거푸집을 부은 듯 획일화돼 있기에, 그 안에서 취향을 마음껏 펼치기엔 한계가 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국평(국민 평수)’이라는 기괴한 단어가 존재하는 곳도 우리밖에 없다. 여기엔 국민이 살 만한 거주지가 공급면적 33평대라는 암묵적인 합의가 내포돼 있는데, 언어가 사고를 지배한다고, 타인이 정해 놓은 33평이 삶의 어떤 지표가 된 분위기도 적잖이 보인다. 유튜브에선 ‘평수가 작지만 원하는 라이프스타일을 누릴 수 있는 집과 매력은 없지만 모두가 선호하는 ‘국평’ 아파트 중 어디를 구매해야 하나요?’류의 의뢰인 사연이 차고 넘친다. 개인의 취향이 사회가 재단해 놓은 규격에 굴복하기 일쑤다.
이것은 나의 취향인가, 타인의 취향인가. 그리고 타인의 취향이라고 믿는 것들도 진짜 취향인가, 아니면 유행일 뿐인가 싶어지는 상황은 도처에 있다. 여행길, 식당 선정이 그중 하나. 밥 먹을 시간이 되면 모두가 휴대전화를 켜고 후기를 검색한다. ‘맛집’으로 추천된 집을 선택하고, 음미하기보다는 맛을 확인한다. 실패 확률이 낮기는 하지만, 결과적으로 다른 여행자들과 하등 다르지 않은 동선으로 움직이는 현상을 낳는다.
요즘 극장가엔 돌다리를 두들겨보는 관객이 많다. 타인이 남긴 후기를 확인하고 영화를 선택하는 것인데, 티켓값이 뛰면서 검증받은 영화만 보자는 분위기가 퍼진 탓이다. 그러나 ‘영화 감상’이라는 게 동일할 순 없다. 타인에게 별로인 영화가 자신에겐 인생 영화가 될 수 있고, 재밌다고 소문난 영화를 보며 하품만 해댈 수도 있다. 즉, 보지 않고는 모른다. 봐야만, 나에게 의미 있는 영화를 ‘발견’할 수 있다. 우린 타인의 취향에 기대 나의 취향을 발견할 기회를 놓치고 있는 건 아닐까. 인공지능(AI)이 추천해주는 플레이리스트를 들으며, 그것이 내 취향이라고 오해하는 것처럼 말이다.
‘취향이란, 인간 그 자체’라는 말을 남긴 건 대문호 톨스토이다. 자신이 정말 좋아하는 것들이 쌓여, 나라는 사람을 드러내는 지문이 된다는 것일 테다. 이 멋진 말은, 그러나 지금처럼 쏟아지는 정보에 휩쓸리기 쉬운 시대를 맞아 종종 위협받는 인상이다. 가령, 수많은 정보가 오가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보자. 흔히들 SNS가 취향을 드러내는 공간이라고 한다. 나는 여기에 반만 동의한다. 자신의 후진 취향을 들키지 않으려 그럴듯해 보이는 것들만 진열하는 공간이 SNS이기도 해서다. 브랜드 로고를 취향이라 믿는 이들도 자주 목격된다. 내가 소유한 브랜드가 곧 나라는 인식. 그러나 취향은 그가 어떤 생각을 지녔는지를 가늠하게 해 주는 것이지, 그가 무엇을 소유하고 있는가를 알려주는 게 아니다. 상표에 도취되면, 진짜 나의 브랜드는 무엇인지 영영 모르고 살게 된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또한 이러한 함정에서 자유롭지 않음을 고백한다. 반성하며, 일단 유행에 휩쓸려 고른 인테리어 품목들부터 뜯어보기로 한다.
정시우 대중문화 칼럼니스트·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