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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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일호의미술여행] 사르트르와 자코메티

고독과 힘겨움에 지친 한 사람이 앞을 향해 굳건히 걸어가고 있다. 알베르토 자코메티 작품인데, 장폴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를 잘 반영했다고 평가받는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자코메티는 자신이 추구했던 초현실주의 경향을 버리고, 거친 현실 속에서 실존하는 인간 존재의 모습을 나타내려 했다. 굳은 표정의 얼굴과 깡마른 몸에서 행동하는 인간의 결연한 의지를 느낄 수 있게 했다.

알베르토 자코메티 ‘걸어가는 사람’(1960)

실존주의는 2차 세계대전 후 사르트르에 의해 유행한 사상이었다. 큰 전쟁을 치른 후, 유럽은 폐허가 됐고 사람들은 현실적인 생존이라는 구체적인 문제에 매달렸다. 인간 정신에 대한 신뢰도 무너졌다. 인간이 정신 능력으로 문명의 발달을 이루었지만, 그 능력으로 만든 무기에 의해 인간이 살육되는 비극적 참상을 겪었기 때문이다. 실존주의는 이런 상황 속에서 팽배했던 절망감과 허무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모색이었다.

사르트르는 인간 존재의 성격을 현실존재 즉, 실존이란 말로 규정하고, 한 사람 한 사람이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개별성과 주체성을 갖고 있으며, 스스로의 존재 방식을 선택해 나간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종전의 철학이 정신의 우월성을 지나치게 앞세웠다고 비판했으며, 정신적 사유보다 신체를 통한 행동과 실천을 강조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이었기에 전쟁 전에 유행한 초현실주의처럼 환상적이며 신비적인 예술은 공감을 얻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자코메티는 실존하면서 스스로를 만들어 가는 외로운 인간 존재의 모습을 나타내려 했다. 특정한 상황을 받아들이고 헤쳐 나가는 개별적 삶의 주체로서 개인의 굳건한 모습을 보여주려 했다. 또 인간이 정신을 통해 머릿속으로만 사유하는 존재이기보다 현실 속에서 몸으로 걷고 공간을 가로지르면서 행동하는 존재임을 앞세웠다. 전쟁으로 인한 상처를 안고 있지만, 포기하지 않고 묵묵히 앞을 보며 나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갈망했다.

힘든 현실 속에서 취업을 포기하고 ‘그냥 쉬었다’는 청년층이 늘어난다는 보도를 보고 안타깝고 미안한 마음으로 이 작품을 다시 들여다본다.

박일호 이화여대 교수·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