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파의 재산/김종성/북피움/2만2000원
이완용, 이근택, 이지용, 박제순, 권중현, 송병준, 이병무, 고영희, 조중응, 이재곤, 임선준, 윤덕영, 민병석, 조민희.
일본제국주의를 도와 대한제국을 멸망시키는 데 크게 기여한 1905년 을사오적, 1907년 정미칠적, 1910년 경술국적(8명)에 한 번 이상 이름을 올린 친일파 14명이다. 이 중 두 번 이름을 올린 ‘친일 2관왕’은 4명(박제순, 이병무, 조중응, 고영희)이다. 세 차례 모두 관여한 ‘3관왕’도 있으니, 매국노의 대명사인 이완용이다. 그는 나라를 파는 데 앞장선 대가로 떼돈을 벌었다.
이완용은 일제의 국권 침탈 이듬해인 1911년 1월13일 ‘은사공채’ 15만원(현재 가치 30억∼150억원)을 받았다. 당시 군수 월급(50원)의 3000배나 되는 상금이다. 은사공채는 일제가 조선(한국) 강탈을 도운 친일파들에게 보상한 국채 증서로, ‘일왕이 은혜로 하사한다’는 의미다. 일제는 당시 ‘백작’ 이완용을 비롯해 고종의 형인 황족 이재면(83만원, 현재 166억∼830억원) 등 친일 조선귀족 76명을 은사공채 지급 대상자로 선정해 총 600만원(현재 1200억∼6000억원)이나 지급했다. 재원은 물론 자체 예산이 아닌 식민지 조선 민중을 착취해 거둔 세금이다. 이완용은 조선총독 자문기관인 중추원 고문과 부의장으로 부역하면서 연 수당 1600∼3500원을 받기도 했다. 특히 1910년 8월29일 대한제국 멸망을 전후해 내각총리대신으로 잔무를 처리한 수당(60원)과 퇴직금(1458원 33전)까지 살뜰히 챙겼다. 그는 고종과 순종이 하사한 금전, 친일 대가로 받은 비공식적 금전 등까지 합쳐 곳간 규모를 꾸준히 불려 죽기 전인 1925년엔 친일파 민영휘에 이어 한국인 부자 2위로 기록됐다. ‘경성(서울) 최대 현금 부호’라고 불릴 정도였다.
대표적인 친일파 30명의 ‘친일 재산’과 ‘친일 연대기’를 기록한 이 책의 저자는 “이완용은 관료 출신치고는 이례적으로 자산 순위 1, 2위를 다투는 갑부 반열에 올랐다. 친일매국이 그에게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던 것”이라고 일갈한다.
책에 따르면, 친일에 관한 오해는 ‘친일은 부득이했다’는 논리다. 일제의 위협과 강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친일을 했을 뿐이란 주장이다. 물론 일제의 압력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압력은 일본군위안부와 강제 징용·동원 피해자들에 대한 압력과는 차원이 달랐다. 이런 피해자들에 대한 압력은 거부하기 힘든 것이었지만, 상류층이나 지식인 출신 친일파들에 대한 압력은 이와 달랐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마지못해 친일을 했다고 변명하는 사람 대다수는 실제로 일정한 불이익을 감수하고 일본의 요구를 어느 정도 거부할 수 있는 지위에 있었다. 저자는 그들의 변명이 새빨간 거짓말이고, 친일의 가장 큰 이유는 자신들의 경제적 이익과 기득권 유지를 위한 것이었음을 낱낱이 고발한다. 이를 통해 지금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되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