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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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蘭)이 일으킨 분란 [김태훈의 의미 또는 재미]

‘겨울 추위를 견디는 풀’이란 뜻의 인동초(忍冬草)는 흔히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상징으로 통한다. 박정희정부와 전두환정부 두 군사정권을 거치며 DJ가 겪은 정치적 수난 때문에 그럴 것이다. 그 DJ의 대통령 취임을 앞둔 1998년 2월 국내 화훼업계에서 인동초가 품귀 현상을 빚는 보기 드문 일이 벌어졌다. 보통 승진·영전 등을 축하하는 선물로 난(蘭·난초)이 많이 활용되지만, 그 시절만큼은 새 정부 출범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마침 DJ와 동일시되는 인동초를 찾는 이가 크게 늘었기 때문이다. 사실 인동초는 난처럼 흔히 볼 수 있는 대중적 식물은 아니다. 언론 보도에 의하면 1997년 한 해 동안 충남 부여 농촌지도소에서 재배한 인동초가 약 1500점이었는데, 그해 12월 DJ의 대통령 당선 직후 순식간에 모두 팔려 나갔다고 한다.

 

서울 용산의 한 건물 고층부 사무실 창가에 난 화분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SNS 캡처

정부 부처의 고위 관료나 대기업 및 금융기관 간부 등이 승진 또는 영전을 하면 축하의 뜻으로 난을 선물하곤 한다. 난은 매화, 국화, 대나무와 더불어 매란국죽(梅蘭菊竹)을 이룬다. 예로부터 이 네 식물을 사군자(四君子)라고 불렀는데 여기에는 ‘올곧은 선비의 기풍과 닮았다’는 뜻이 담겨 있다. 이처럼 좋은 이미지를 지닌 난은 가격도 그리 비싸지 않아 뇌물이나 청탁의 냄새를 풍기지 않는다. 여기에 공간을 적게 차지하고 오랫동안 간직할 수 있다는 것도 장점으로 꼽힌다. 그러다 보니 관공서나 기업들 인사철이면 난 주문이 급증한다. 1993년 2월 김영삼(YS) 대통령이 취임하기 직전 인천에서 난 화분이 품절되는 일이 벌어졌다. YS의 공직 인사로 난 수요가 폭증할 것을 예상한 서울의 화훼업자들이 인천 물량까지 전부 확보한 결과였다.

 

난이 너무 흔하다 보니 때로는 다른 식물이 더 주목을 받곤 한다. 1996년 5월 YS가 당시 여당이던 신한국당 주요 당직을 대대적으로 개편했다. 새로 당직을 맡게 된 인사들 사무실에 알록달록한 관상용 선인장 화분이 축하 선물로 배달됐다. 화분을 보낸 주인공은 다름아닌 이인제 당시 경기지사였다. YS가 차기 대통령 후보로 ‘깜짝 놀랄 만한’ 인물이 등장할 것이란 취지의 발언을 해 40대 중반의 젊은 정치인인 이 지사의 존재감이 급속히 상승하던 때였다. 이 에피소드를 다룬 신문 기사는 “(이 지사가 선물한) 선인장 화분의 가격은 난 화분과 비슷한 개당 10만원 정도인 것으로 알려졌지만, 그 ‘희귀성’ 때문인지 숱하게 쏟아진 난 화분이나 꽃바구니들을 제치고 대부분의 방에서 가장 보기 좋은 곳을 차지했다”고 묘사하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 사진은 지난 4월29일 여야 영수회담을 위해 용산 대통령실에서 만나 악수하는 모습. 뉴시스

지난 18일 제1야당이자 원내 과반 다수당인 더불어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이재명 전 대표가 다시 당 대표로 뽑혔다. 이에 윤석열 대통령이 축하의 뜻으로 난 화분을 보내려고 하는데 일이 영 꼬이는 모양이다. 용산 대통령실은 “축하 난을 전달하기 위해 이 대표 측에 예방을 타전했지만 별다른 반응이 없다”고 밝혔다. 이에 민주당은 대통령실 주장은 사실이 아니라고 반박했다. 그러면서 “날짜를 잡을 테니 기다려달라고 한 것일 뿐”이란 입장을 내놓았다. 주는 쪽에서 받는 쪽을 향해 ‘빨리 좀 받아 달라’ 하고 조르는 듯해 어색하기 그지없다. 오죽하면 개혁신당이 나서 “경제는 초비상인데 거대 양당은 축하 난을 받느니 안 받느니 유치한 감정 싸움을 하고 있다”고 비판했을까. 난이 축하의 뜻을 전하기는커녕 분란만 일으키는 모양새다.


김태훈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