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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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직 대통령 존영(尊影) 경쟁 [김태훈의 의미 또는 재미]

서울 여의도 국민의힘 당사에는 역대 대통령들 가운데 이승만, 박정희, 김영삼(YS) 3인의 얼굴 사진이 걸려 있다. 국민의힘이 4·10 총선에서 참패한 뒤 당 비상대책위원장을 맡은 황우여 전 부총리는 취임 첫날 세 전직 대통령의 사진을 가리키며 “국민의힘은 자유, 민주, 공화국인 대한민국을 이룩한 위대한 정당이고 대한민국의 헌법 가치를 지켜온 자랑스러운 보수 정당”이라는 말로 당원들에게 자부심을 가질 것을 주문했다. 혹자는 YS가 과거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에 반대하고 박정희의 공화당 정권과도 싸운 점을 들어 ‘부자연스러운 조합’이란 지적을 내놓기도 한다. 1951년 국무총리 비서로 처음 정계에 입문해 야당 총재로 있던 1990년 초까지 YS의 약 40년 정치 이력을 감안하면 일견 타당한 문제 제기라고 하겠다.

국민의힘의 전신인 옛 자유한국당 당사 회의실에 김영삼(왼쪽부터), 박정희, 이승만 전 대통령의 얼굴 사진이 걸려 있다. 오른쪽은 당시 자유한국당 대표이던 홍준표 현 대구시장. 연합뉴스

민주화 이후인 1988년 총선에서 여당이자 원내 1당인 민정당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제1야당 자리는 김대중(DJ) 총재의 평민당에 돌아갔다. YS의 민주당은 원내 3당이자 제2야당으로 전락했다. 절치부심하던 YS와 당시 여소야대 정국에서 곤란을 겪던 노태우 대통령의 이해관계가 딱 들어맞았다. 1990년 초 민정당, 민주당 그리고 김종필(JP) 총재의 공화당이 전격적으로 3당 합당을 성사시켰다. 그렇게 탄생한 민자당은 1992년 대선 후보로 YS를 뽑았고, 예상대로 그는 DJ를 누르며 대통령에 당선됐다. 과거 YS가 반(反)민주·독재 세력으로 규정해 비판한 민정당 및 공화당 소속 인사들의 도움을 받아 대권을 쟁취한 셈이다. YS 본인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그가 이승만, 박정희와 나란히 있는 게 그리 어색하지 않은 이유다.

 

국민의힘과 달리 더불어민주당 당사에는 역대 대통령들 중 DJ, 노무현, 문재인 3인의 얼굴 사진이 걸려 있다. 모두 YS정부(1993년 2월∼1998년 2월) 이후에 집권한 이들이다. 롤모델로 삼는 전직 대통령의 면면만 놓고 보면 민주당이 국민의힘보다 젊은 정당인 셈이다. 사진 선택에서 알 수 있듯 민주당 사람들은 YS를 포함해 그 이전 대통령들의 정부는 모두 민주 정부가 아니라는 사관(史觀)을 갖고 있다. 그래서 ‘1기 민주 정부’(DJ정부), ‘2기 민주 정부’(노무현정부), ‘3기 민주 정부’(문재인정부) 같은 표현을 쓴다. 그럼 DJ가 집권하기 전 대한민국에 민주주의는 아예 없었다는 의미인지, 또 노무현 이후 이명박·박근혜는 국민의 자유로운 선거에 의해 뽑힌 대통령이 아니라는 뜻인지 의문이 드는 게 현실이다.

새로운미래 전병헌 대표가 28일 당사에 김대중(왼쪽부터), 노무현, 문재인 전 대통령의 얼굴 사진을 건 뒤 그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전 대표는 세 전직 대통령의 정신, 가치, 업적을 계승하는 적통은 더불어민주당이 아닌 새로운미래란 점을 강조했다. 새로운미래 홈페이지

민주당 이재명 대표와 갈라선 이낙연 전 총리가 주도해 만든 새로운미래가 28일 당사에 DJ, 노무현, 문재인 세 전직 대통령 사진을 거는 행사를 열었다. 새로운미래 전병헌 대표는 “민주당은 ‘이재명 1극 체제’, ‘1인 우상화’, ‘이재명 방탄’ 정당으로 전락했다”며 “민주당은 더 이상 세 분 대통령의 존영(尊影)을 걸 자격이 없다”고 말했다. 이어 세 전직 대통령의 정신, 가치, 업적을 계승하는 적통(嫡統)은 민주당이 아니고 새로운미래란 점을 강조했다. 2020년대를 살아가는 국민들, 특히 MZ세대 입장에서 ‘적통’을 둘러싼 경쟁은 다소 뜬금없어 보인다. 원내 의석이 1석뿐인 새로운미래와 170석의 거대 정당 민주당의 다툼은 다윗과 골리앗의 대결을 연상케 한다. 물론 세상사 대부분이 그렇듯 길고 짧은 것은 대봐야 하는 법이긴 하다.


김태훈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