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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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변화 국민생명 위협… 국가가 보호해야”

헌재 “탄소중립법 헌법 불합치”

청소년단체 헌법소원 제기 4년 만
“미래세대 큰 영향… 환경권 지켜야
2049년까지 감축 목표 안 정해
정부, 과소보호 금지 원칙 어겨”
중장기 감축계획 국회 입법 요구

청구인단 “끝 아닌 기후대응 시작”
환경부 “후속 조치 충실히 이행”

헌법재판소가 29일 탄소중립법 조항에 헌법불합치 판단을 내린 데는 기후위기가 국민의 기본권을 위협하는 ‘위험상황’에 해당한다는 인식이 깔렸다. 헌재는 특히 기후위기의 영향을 더욱 크게 받게 될 미래세대를 위해 국가가 구체적인 보호조치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후위기비상행동 등 시민단체 회원들이 29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앞에서 개최한 기후 헌법소원 최종선고 관련 기자회견에서 한제아 양이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헌재는 이날 탄소중립기본법 8조 1항의 위헌성을 따지기에 앞서 기후변화가 ‘생활의 기반이 되는 제반 환경을 훼손하고 생명·신체의 안전 등을 위협할 수 있는 위험’이라고 전제했다. 이에 기후변화의 원인을 줄여 이를 완화하는 것이 ‘건강하고 쾌적한 환경에서 생활할 권리’인 환경권을 지키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2031년부터 2049년까지 온실가스 배출량 감축 목표를 법률에 전혀 규정하지 않은 것은 과소보호금지 원칙을 어겼다고 지적했다. 과소보호금지 원칙이란 국가가 국민의 기본권을 보호하기 위해 적절하고 효율적인 최소한의 보호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것이다. 헌재는 “구체적인 감축목표를 정할 때 단기적일 수도 있는 정부의 상황 인식에만 의존하는 구조로는 온실가스 감축정책의 적극성 및 일관성을 담보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헌재는 온실가스 감축목표를 정하는 일이 현재 국민의 기본권을 광범위하고 지속적으로 제한하는 일이라는 점을 언급하며 국회가 중장기적 계획을 법률에 구체적으로 담아야 한다고도 강조했다. 헌재는 “구체적인 감축수단에 관해서는 감축목표를 둘러싼 이해관계가 매우 다양하게 대립할 수도 있다”며 “매우 높은 수준의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므로, 2031년 이후의 기간에 대해서도 그 대강의 내용은 ‘법률’에 직접 규정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특히 이른바 미래세대는 기후위기의 영향에 더 크게 노출될 것임에도 현재의 민주적 정치과정에 참여하는 것이 제약돼 있다”며 “이런 점에서 중장기적 온실가스 감축계획에 대해 입법자에게는 더욱 구체적인 입법의 의무와 책임이 있다”고 덧붙였다. 그럼에도 2031년 이후에 대한 입법이 미비한 것은 ‘행정권의 발동은 법률에 근거를 두어야 한다’는 헌법상 법률유보원칙을 위배한 것이라고 판단했다.

 

헌재는 다만 2030년 배출량 목표치나 부문별·연도별 감축 목표치가 기온 상승을 막기엔 역부족이라 위헌이라는 청구인 주장은 모두 받아들이지 않았다. 헌재는 “입법자 또는 집행자가 여러 요소를 종합적으로 고려해 정한 ‘특정 연도’의 감축목표 비율에 관한 구체적 수치에 대해, 헌재가 부합하지 않는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고 했다. 2030년의 감축 목표에 대해선 위헌 의견을 낸 재판관이 5명으로 과반이었지만 인용 결정에 필요한 정족수(6명)를 채우지 못했다.

 

이날 헌재 결정은 청소년 환경단체인 ‘청소년 기후행동’이 2020년 3월 헌법소원을 처음 제기한 뒤 4년 만에 나온 결론이다. 영유아 부모와 시민단체 등이 유사한 취지로 제기한 3건의 청구도 병합돼 함께 선고가 이뤄졌다. 정부가 기후위기를 방치하거나 가속해 주민의 기본권을 침해했다는 법원 등의 판결은 일부 유럽국가와 미국에서 나온 적 있지만 아시아에서는 전무하다.

이종석 헌법재판소장을 비롯한 헌법재판관들이 29일 헌법소원·위헌법률 심판이 열린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심판정에 입장해 착석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이번 헌법소원 청구인·법률대리인단은 “판결은 끝이 아닌 기후대응의 시작”이라며 “오늘 판결은 기후위기를 넘어 모두의 권리를 지키기 위한 의미 있는 진전이라는 점은 분명하다”고 했다.

 

세계자연기금(WWF)은 “소송의 주요 쟁점이었던 국가 온실가스 감축목표를 2030년부터 2050년까지 단계별 로드맵을 세워 국가의 기본권 보호의무를 충실히 이행해야 한다”며 “한국 정부는 후속 조치에 나서야 한다”고 촉구했다.

 

환경부도 헌재 결정을 존중한다며 “후속조치를 충실히 이행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종민·조희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