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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메밀꽃 따라 평창에 서둘러 가을 오다 [최현태 기자의 여행홀릭]

하얀 꽃망울을 터뜨린 평창 봉평 메밀꽃 장관/이효석 생가엔 자이언트 선골드 해바라기와 백일홍도 활짝/6~15일 2024 평창효석문화제 열려 다채로운 행사 펼쳐져/고랭지 배추 고향 안반데기/초록배추·하얀 풍력발전기 어우러지는 예쁜 풍경 펼쳐져

안반데기.

어머니 품처럼 부드럽게 물결치는 초록 언덕. 느긋하게 돌아가며 날갯짓하는 눈부시게 하얀 풍력발전기. 그 위를 장식하는 뭉게구름 떠가는 푸른 하늘까지. 만화처럼 펼쳐지는 풍경은 이탈리아 토스카나의 언덕을 똑 닮았다. 그런데 가까이 갈수록 드러나는 초록의 실체는 다름 아닌 배추. 산 능선을 따라 끝없이 펼쳐진 배추밭 풍경은 눈을 의심하게 만든다. 배추밭이 이토록 아름다울 수 있다니. 다정한 연인 서로 손 잡고 안반데기 배추밭 속으로 걸어 들어가니 풍력발전기와 어우러지며 어디서도 볼 수 없는 ‘낭만 배추밭’ 풍경이 완성된다.

세계일보 여행면. 편집=김창환 기자
세계일보 여행면. 편집=김창환 기자

◆고랭지 배추 고향 안반데기 가보셨나요

 영동고속도로를 달리다 대관령IC로 빠져 송천을 따라 구불 산길을 오르다 보면 30분 만에 구름도 쉬어가는 별빛고운 안반데기 마을에 닿는다. 행정구역은 강원 강릉시 왕산면이지만 평창군 대관령면과 경계지점에 있다. 차에서 내리자 한낮의 햇볕은 아직 따갑지만 대형 공기청정기를 옆에 틀어 놓은 듯, 청량한 공기가 폐 속으로 마구 파고든다. 끈적이는 습도는 하나도 없어 아주 쾌적하다. 이유가 있다. 북쪽 고루포기산(1238.3m)과 남쪽 옥녀봉(1146.2m) 사이에 길게 놓인 안반데기 마을은 해발고도 1100m를 넘기 때문이다.

 마을회관을 지나 산길을 좀 더 오르면 전망대 주차장이 나온다. 이곳이 안반데기 마을의 전경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뷰포인트. 오른쪽 높은 능선을 따라 시력이 닿지 않는 곳까지 하얀 풍력발전기가 줄지어 섰고 그 아래 비탈을 덮은 녹색의 물결은 온통 배추밭이다. 주변의 산자락을 모두 덮으며 배추밭이 끝도 없이 펼쳐지는 풍경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안반데기.

안반데기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넓은 고랭지 배추밭으로 규모가 약 200만㎡에 달한다. 인근 태백 ‘배추고도’ 귀네미 마을과 함께 고랭지 배추밭으로는 가장 유명한 곳이다. 곳곳에 이가 빠진 듯한 빈공간은 이미 배추를 수확한 흔적. 8월 말부터 본격적으로 배추 출하가 시작돼 대형마트 등에는 안반데기 배추가 깔리기 시작했다.

 안반데기는 해발고도가 높아 여름철에도 서늘한 기온을 유지한다. 대표적인 고랭지 배추 산지로 명성을 떨치는 이유다. 안반데기 배추는 낮은 기온과 큰 일교차 덕분에 속이 단단하고 아삭한 식감을 자랑한다. 병충해가 적어 농약 사용량을 크게 줄일 수 있고 깨끗한 공기와 맑은 물에 자라는 건강한 채소여서 안심하고 먹을 수 있다. 무엇보다 햇볕을 충분히 받고 자라기 때문에 비타민C와 미네랄 함량이 풍부해 면역력 강화에 도움을 준다. 김치, 겉절이, 쌈 등 다양한 요리에 활용되며 특히 겉절이로 만들면 아삭한 식감과 달콤한 맛을 동시에 즐길 수 있다.

안반데기.

 안반데기 배추가 풀리는 9월은 주부들의 손길이 바빠지는 시기지만 연인들에게는 최고의 인생샷을 얻을 기회다. 전망대 주차장 위쪽 배추밭이 뷰포인트. 연인들이 배추밭을 배경으로 서면 파란 하늘과 맞닿은 초록 배추밭과 하얀 풍력발전기가 어우러지는 동화 같은 풍경을 영원한 추억으로 남길 수 있다.

 안반데기는 떡메로 반죽을 내리칠 때 쓰는 오목하고 넓은 통나무 받침판 ‘안반’과 평평한 땅을 뜻하는 ‘데기’가 합쳐진 말이다. 마을 지형이 안반처럼 우묵하면서도 널찍해 이런 이름을 얻었다. 배추밭 경사가 가팔라 기계농사가 불가능하고 모두 손으로 재배해야 한다. 그만큼 농민의 땀이 잔뜩 밴 배추다. 마을의 역사는 1965년쯤 화전민들이 정착해 척박한 산비탈을 곡괭이와 삽만으로 깎아 밭을 개간하면서 시작됐다. 1995년에 대를 이어서 밭을 갈던 28가구 주민들이 배추밭을 정식으로 매입한 것으로 전해진다.

봉평 메밀꽃밭.

◆평창의 가을은 메밀꽃 따라 온다

 평창은 전체 면적의 65%가 해발 700m 고원지대여서 그만큼 가을도 서둘러 온다. 평창의 가을을 알리는 전령사는 하얀 메밀꽃. 봉평면 봉평메밀막국수 거리와 가산 공원을 지나 흥정천을 가로 지르는 남안교를 건너면 왼쪽으로 가산 이효석의 대표 소설 ‘메밀꽃 필 무렵’의 실사 버전인 메밀꽃밭이 광활하게 펼쳐진다. 6~15일 열리는 2024 평창효석문화제에 맞춰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한 하얀 메밀꽃이 오두막을 지나 저 멀리 산허리까지 뒤덮은 풍경이 장관이다. ‘소금을 뿌린 듯이 흐붓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라는 소설 속 장면 그대로다. 다정하게 손을 잡고 메밀꽃밭 사이로 걸어 들어가는 연인. 꽃보다는 메밀꽃 열차가 더 신나고 재미있는 꼬마. 나귀를 타고 소설의 주인공처럼 꽃밭을 거니는 이들의 얼굴에는 여유로운 가을 정취가 물씬 묻어난다.

봉평 메밀꽃밭.

곳곳에 설치된 포토존은 메밀꽃을 배경으로 추억을 남기려는 가족들의 줄이 길다. 포토존에선 추억의 DJ박스, 사랑의 엽서쓰기를 즐길 수 있다. 또 송일봉 여행작가와 함께하는 장돌뱅이 길 걷기, 메밀꽃 필 무렵 한지공예, 아티스트 버스킹, 매직 저글링쇼, 메밀꽃밭 동네한바퀴 놀이, 허생원과 당나귀 퍼포먼스 등 다채로운 행사가 펼쳐질 예정이다. 평창에서 생산되는 메밀막걸리, 메밀소주를 활용한 메밀꽃 칵테일바도 마련된다.

이효석 문학관 문학정원.

 메밀꽃밭을 지나면 이효석 문학관이 등장한다. 잔디가 깔린 넓은 문학 정원에는 이효석이 지금도 책상에 앉아 원고에 뭔가를 끄적거리고 있다. 그 옆엔 나풀거리는 원피스와 챙 넓은 모자로 한껏 멋을 낸 여자가 이효석의 연인처럼 다정하게 앉아 사진 좀 제대로 찍어보라며 친구를 재촉한다. 문학관은 이효석의 대표 작품과 일대기를 한눈에 볼 수 있고 육필원고 유품도 만날 수 있으니 꼭 들러보길. 옛 봉평 장터 모형도 실감 나게 잘 꾸며 놓았다.

효석달빛언덕 입구 코스모스.
효석달빛언덕.

◆하늘거리는 코스모스에 여심도 ‘심쿵’

 안으로 좀 더 들어가면 거대한 당나귀 모양으로 만든 달빛나귀 전망대와 실개천이 어우러지는 효석달빛언덕이 여행자를 기다린다. 가을바람 따라 한들한들거리는 코스모스가 활짝 피어 이미 무르익은 가을의 한가운데로 들어선 기분이다. 꿈꾸는 달 카페는 여행자들이 쉬어가는 작은 도서관. 차 한잔 마시며 이효석의 소설 등 다양한 문학작품을 즐길 수 있다. 원형 책장 한가운데에는 대형 황토 화덕이 설치돼 쌀쌀한 늦가을에 찾으면 좀 더 아늑한 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을 것 같다.

꿈 꾸는 달 카페.
효석달빛언덕.

 달 카페 옥상은 전망대로 이어지는 하늘다리로 알록달록한 바람개비가 가을바람을 맞고 신나게 돌아간다. 전망대를 지나면 이효석 생가를 만난다. 그가 태어나고 어린 시절을 보낸 생가를 증언과 고증을 바탕으로 복원해 놓았다. 효석문화마을에서 가장 가을향기가 넘쳐나는 곳이다. 초가의 담장을 따라 아이 얼굴만 한 자이언트 선골드 해바라기와 백일홍이 활짝 피어 생가를 예쁘게 꾸민다. 생가 툇마루에 앉아 꽃구경하며 도란도란 수다 떨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이효석 생가.
 근대문학체험관.

 근대문학체험관은 이효석이 활동하던 1920~1930년대의 시간, 공간, 문학을 이야기로 풀어내 한국 근대 문학과 한층 더 가까워질 수 있는 공간이다. 특히 이효석, 김기림, 정지용 등이 만든 ‘구인회’ 활동을 엿볼 수 있다. 순수문학을 지향하던 구인회는 3년 만에 해체됐지만 한국 모더니즘을 대표하는 문학단체로 평가받는다. ‘공간-고향에 대한 추억’으로 들어서면 메밀꽃이 흐드러진 이효석 고향 봉평 풍경이 하얀 천에 투영되는 환상적인 풍경이 펼쳐진다. 인생샷을 얻을 수 있으니 놓치지 말기를.

푸른집.

체험관을 나서 자갈이 깔린 회랑길을 오르면 푸른집으로 연결된다. 이효석이 평양에서 거주하던 집을 재현해 놓은 곳이다. 그는 1934년 숭실전문학교 교수로 부임하면서 평양으로 이주했고 이곳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며 우리나라 근대문학의 백미로 평가받는 ‘메밀꽃 필 무렵’ 등 다수의 작품을 집필했다. 이효석이 매일같이 음악을 듣던 축음기, 쇼팽과 모차르트의 곡을 연주하던 피아노, 평소 ‘거의 인이 박인 듯하다’고 표현할 정도로 즐기던 커피를 내리는 모카 포트 등이 놓여 이효석의 낭만을 고스란히 전한다. 그는 산문 작품 ‘낙엽을 태우면서’에서도 낙엽을 태울 때 피어오르는 향을 ‘갓 볶아낸 커피의 향’으로 비유했을 정도로 커피를 사랑했다. 이불 끌어당길 정도로 쌀쌀한 늦가을 밤, 벽난로 장작불 타닥타닥 타오르는 산장의 푹신한 소파에 몸을 맡기고 쇼팽의 피아노곡 들으며 이효석이 좋아하던 ‘진한 다갈색의 향기 높은 모카’에 빠져드는 모습을 상상한다.


평창=글·사진 최현태 선임기자 htchoi@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