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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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2막 동력은 보람·쓸모·자존감”… 온전한 ‘나’를 찾다 [심층기획-2차 베이비부머 은퇴 쓰나미]

〈1〉 퇴직자 5人5色 일과 삶

시니어 컨설턴트 통해 KT 재고용
“후배들에게 노하우 전수할 때 보람”

건물 철거로 식당 접고 생산직 도전
“손님 걱정 안하고 저녁있는 삶 즐겨”

“고령자 내일설계휴직제도 등 도움
시간제 등 다양한 형태 일자리 필요”

주된 일자리에서 최소 25년 이상 일한 뒤에도 경력을 이어가는 ‘2차 베이비부머’들은 ‘경제적 이유’를 경제활동의 동력 1순위로 꼽지 않았다. 각기 다른 이력의 5명은 인터뷰 내내 ‘보람’, ‘쓸모’, ‘자존감’을 강조했다. 수입의 필요성은 절감하지만, 그것이 일터로 나가는 이유의 전부는 아니라는 의미다. 

 

27년간 홀로 한식당을 운영하다 중소기업 생산직에 취업한 김민숙(58)씨. 그는 건물 철거로 어쩔 수 없이 가게를 접어야 했다. 타의로 일자리를 잃은 것과 마찬가지였다. 김씨는 “식당을 다시 해볼까도 고민했지만, 새로 인테리어를 하고 조리 시설을 갖추는 데 비용이 만만치 않게 들어갈 것으로 봤다”며 “점점 나이는 드는데 투자한 돈을 제대로 회수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고민이 됐고, 결국엔 취업을 하기로 마음먹게 됐다”고 말했다. 

김씨처럼 퇴직 뒤 고민에 휩싸이는 건 흔한 일이다. 8일 한국고용정보원이 발간한 ‘베이비부머의 주된 일자리 퇴직 후 경력경로 및 경력발달 이해를 위한 질적 종단 연구’에 따르면 “대부분 주된 일자리에서 퇴직하는 순간, 존재감의 급격한 하락을 경험”하고 이는 “퇴직 후 많은 베이비부머가 우울, 좌절, 분노 등의 부정적 정서를 겪게 되는 이유”다.

 

관건은 이런 부정적 경험을 어떻게 극복하느냐인데, 각자의 노력과 함께 사회의 지원과 제도적 뒷받침이 요구된다.

 

◆두번째 일터에서 다시 찾은 자존감

 

기존 경력을 살려 KT 기술직으로 올해 4월 재고용된 유학성(60)씨와 지난달부터 충주운전면허시험장 환경관리직으로 일하는 박문활(62)씨는 경력을 이어간다는 데 큰 의미를 두고 있다.

 

유씨는 최대 2년간 계약직으로 정년퇴직자를 재고용하는 KT의 시니어컨설턴트 제도를 이용한 사례자다. 그는 “정든 직장, 동료들과 헤어지는 아쉬움이 컸다”며 “현 직장 외에 다른 직장을 구할 생각은 한 적이 없고, 조직 내에서 잘하고 있다고 느끼는 한 계속 하고 싶은 마음”이라고 했다. 이어 “후배들에게 노하우를 전수할 때는 ‘아직 나를 필요로 하는구나’ 자부심을 느낀다”고 했다.

박문활씨가 한국도로교통공단 산하 충주운전면허시험장에서 환하게 미소짓고 있다. 한국폴리텍대학교 제공

공군에서 항공기 정비 병과로 근무하며 준사관까지 오른 박씨는 용접, 공조설비 분야에 대한 노하우를 은퇴 뒤 경력을 설계하는 데 활용했다. 이달 6일 출근 한 달째가 된 유씨는 “기술에 대한 기본 이해가 있어 시설물에 문제가 생기면 쉽게 안다”며 “제초기, 강풍기 등을 고치면서 시험 응시자들이 느낀 불편함을 없앴을 때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이어 “군대는 통제가 심한 곳인데 여기는 상급자의 일방 지시가 아니라 존중하는 분위기라 좋다”고 덧붙였다. 

 

완전히 새로운 직무 및 직종에 몸담고 있는 2차 베이비부머들도 마찬가지였다. 아로마 공방을 창업한 황경화(55)씨, 직업군인으로 25년 복무한 뒤 아파트 관리사무소에서 일하는 전유성(51)씨, 그리고 김민숙씨는 근무지에서 일할 때 비로소 활력을 느낀다고 한목소리로 말했다.

황경화씨가 서울 관악구에 있는 아로마공방에서 재료들을 소개하고 있다. 황씨는 2022년 29년 재직한 KT를 퇴사한 뒤 공방 문을 열었다. 이제원 선임기자

24살에 입사한 황씨는 50살까지는 일에 대한 회의를 느낀 적이 없다고 했다. 그는 “승진도 빨리하고, 매사 만족스러웠다”며 “50살이 딱 넘으니까 스스로 능력을 의심하고, 자존감도 떨어지고, 굳이 이렇게까지 회사 생활을 유지해야 하냐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시간을 때운다’는 느낌이 싫었다는 황씨는 80살까지 공방을 운영하고자 하는 새 꿈이 생겼다. 그는 “회사도 30년 가까이 다녔으니 이 일도 30년은 하고 싶다”고 말했다.

 

전씨는 직업군인으로 복무할 때는 수시로 벌어지는 작전과 훈련 탓에 항상 긴장 상태였다고 털어놨다. 규칙적인 출퇴근을 하며 가족과 함께 지낼 수 있는 현재 일상에 감사하는 이유다. 그는 “아파트 입주민들이 전기가 나가 에어컨을 못 켠대서 퓨즈를 교체해 고쳐준 적이 있다”며 “감사의 의미로 과일을 받았는데, 그런 게 재미”라고 웃으며 말했다.

 

전씨와 경력은 다르지만 한식당을 운영했던 김씨도 언제 손님이 올지 몰라 항상 긴장 속에 살았다고 했다. 그는 한국폴리텍대학 충주캠퍼스에서 전문기술과정을 수료하며 생산직 취직을 준비했다. 열심히 준비했지만 2022년 입사 초반에는 실수로 제품에 불량이 생길까 노심초사했다고 한다. 이제는 ‘협력해 제품을 완성하는 즐거움’을 느낀다. 김씨는 규칙적인 출퇴근, 온전한 주말과 저녁시간, 일정한 급여를 현 직장의 장점으로 꼽았다. 

전유성씨가 충북 충주 안림천년나무 1단지 아파트 방재실에서 전기 원격검침 시스템을 확인하고 있다. 한국폴리텍대학교 제공

◆“재취업, 대기업에만 맡길 일 아냐”

 

기업의 퇴직 지원 제도를 활용한 이들은 스스로를 “운이 좋은 케이스”라고 한다. 기업에 재고용이 됐든, 퇴직 뒤 새로운 일을 하든 주된 일자리에서 제공한 복지 차원의 프로그램은 제2의 인생을 준비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KT의 ‘내일설계휴직제도’를 이용한 황씨는 “새롭게 경력을 만든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인데, 고령자를 위한 휴직 제도가 불안을 낮춰주는 것 같다”며 “사회적 비용을 절감한다는 차원에서 대기업에만 맡기지 말고 정부가 이를 제도화하면 좋겠다”고 밝혔다. 

 

은퇴 뒤 창업을 하는 고령자를 위한 맞춤 지원책도 수요가 높다. 황씨는 소상공인 지원이 지자체, 고용노동부, 중소벤처기업부 등에 흩어져 있어 지원을 받고자 해도 그 시작부터 쉽지 않다고 털어놨다. 그는 “세금 등 각종 궁금증을 알아서 해결해야 하는데 소상공인 지원 창구가 중구난방이라는 인상이 든다”며 체계적인 지원 필요성을 언급했다. 

유학성씨가 후배 직원에게 무선액세스망운용 노하우를 알려주고 있다. 유학성씨 제공

KT의 시니어컨설턴트 제도로 재고용된 유씨는 이런 제도를 도입한 기업에 정부가 세제 혜택을 부여해 확산토록 해야 한다고 소신을 밝혔다. 이 제도는 매년 정년퇴직자의 20%를 직무와 근무지를 유지하며 계약직으로 일할 수 있게 한 것으로 기간은 최대 2년이다.

 

유씨는 시간제 일자리를 포함해 고령자를 대상으로 한 다양한 근로 형태의 일자리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건강 문제 등으로 전일제 근무를 어려워하는 고령자가 적지 않고, 인생 2막에 시간적 여유를 누리고자 하는 은퇴자들이 많아서다. 그는 “대다수가 70살까지 일하고 싶어 한다”며 “수십년간 일터에서 쌓아온 경력이 사장되면 국가 경쟁력 측면에서도 손해”라고 덧붙였다.

 

스스로 대학을 찾아 노후를 준비한 김씨는 “은퇴 뒤 대부분 국민연금만 바라보게 되는데 그마저도 노후에 필요한 생활비로는 부족하지 않으냐”며 “연금 외에도 안정적인 소득을 얻을 수 있게 일할 기회가 많아지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이지민 기자 aaaa3469@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