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2024년은 20년 가까이 이어져왔던 세계 남자 테니스의 ‘빅3’ 체제가 무너진 원년으로 기억될지도 모른다. ‘테니스 황제’ 로저 페더러(43·스위스·은퇴)가 2003년 윔블던에서 첫 메이저 타이틀을 차지하고, ‘흙신’ 라파엘 나달(38·스페인)이 2005년 프랑스오픈을, ‘무결점의 사나이’ 노바크 조코비치(37·세르비아)가 2008년 호주오픈을 통해 메이저 대회 우승을 처음 차지하면서 ‘빅3’ 체제가 완성됐다. 이들은 오랜 기간 4대 메이저 대회 우승컵을 나눠가지며 ‘빅3’ 체제를 공고히 해왔다.
‘빅3’ 체제는 페더러가 2022년 은퇴하고, 나달이 올 시즌을 끝으로 은퇴가 유력한 상황에서 조코비치만이 전성기 기량을 유지하며 고군분투하며 명맥을 이어오고 있었다. 아니 조코비치는 지난해만 해도 호주오픈과 프랑스오픈, US오픈을 모두 제패하며 영건들의 출현을 억눌러왔다.
세월 앞에 장사가 없다고 했던가. 조코비치마저 올해는 4대 메이저대회에서 무관에 그치면서 ‘빅3’가 메이저 대회 남자 단식 우승자 명단에서 빠진 것은 2002년 이후 올해가 22년 만이다. 시즌 마지막 메이저 대회인 US오픈을 세계랭킹 1위인 얀니크 신네르(23·이탈리아)가 차지하면서 올 시즌 4대 메이저 대회 남자 단식 우승자는 모두 2000년생들로 채워지게 됐다.
신네르는 9일(한국시간) 미국 뉴욕에서 끝난 US오픈 테니스 대회 남자 단식 결승에서 테일러 프리츠(12위·미국)를 3-0(6-3 6-4 7-5)으로 물리쳤다.
이로써 올해 남자 테니스 메이저 우승 트로피는 호주오픈과 US오픈의 신네르, 프랑스오픈과 윔블던은 세계랭킹 3위인 카를로스 알카라스(21·스페인)로 양분됐다. 신네르가 2001년생, 알카라스 2003년생으로 남녀 테니스를 통틀어 4대 메이저 단식 우승자가 모두 2000년대 생인 것은 올해 남자부가 처음이다.
빅3의 위력이 워낙 강력해 여자 테니스에 비해 남자 테니스는 세대교체가 늦었다. 여자 테니스에서 2000년대생 메이저 챔피언이 처음 나온 것은 2019년 US오픈의 2000년생 비앵카 앤드레스쿠(캐나다)였다. 남자 단식은 그보다 3년 늦은 2022년 US오픈에서 알카라스가 첫 2000년대생 메이저 챔피언이 됐으나 2000년대생 선수들의 4대 메이저 점령은 남자 쪽이 더 빨랐던 셈이다.
올해 여자 단식의 경우 프랑스오픈 이가 시비옹테크(1위·폴란드)만 2001년생이고 호주오픈과 US오픈을 석권한 아리나 사발렌카(2위·벨라루스)는 1998년생, 윔블던 우승자 바르보라 크레이치코바(8위·체코)는 1995년생이다.
비록 올 시즌에는 메이저 대회 무관에 그쳤지만, 조코비치는 여전히 세계랭킹 2위로 경쟁력을 유지하고 있다. 당장 2024 파리 올림픽 남자 단식 결승에서 알카라스를 2-0으로 누르고 금메달을 차지하기도 했다. 조코비치에 신네르와 알카라스까지 더해져 새로운 ‘빅3’ 시대가 열릴 것으로 보인다. 다만 조코비치가 불혹을 바라보고 있는 만큼, 장기적으로는 신네르와 알카라스가 앞으로 라이벌 구도를 형성하며 남자 테니스계를 이끌 것으로 예상된다.
일단 곧 발표된 새로운 세계 랭킹에서는 신네르가 1위, 알카라스 3위를 유지하며 조코비치는 4위로 내려간다. 1997년생 알렉산더 츠베레프(독일)가 4위에서 2위로 올라서게 된다.
영국 BBC 애너벨 크로프트 해설위원은 “남자 테니스 미래를 걱정하는 분들이 있지만, 알카라스와 신네르가 있다. 앞으로 그 둘은 엄청나게 많은 명승부를 만들어낼 것”이라고 말했다.
둘의 상대 전적은 알카라스가 5승 4패로 앞서 있다. 이번 US오픈 2회전에서 탈락한 알카라스는 이날 신네르에게 “우승할 자격이 있다. 이 순간을 즐겨라”라고 축하 메시지를 전했다.
어릴 때 스키 선수로도 활약해 하체 힘이 탄탄한 신네르는 그를 바탕으로 한 왕성한 움직임과 강한 스트로크가 강점이다. 신네르는 우승 후 인터뷰에서 “최근 힘든 일이 있었기 때문에 이번 우승은 의미가 크다”며 “나는 테니스를 사랑하고, 여기에 이르기까지 많은 연습을 해야 했다”고 소감을 밝혔다. 이번 US오픈을 앞두고 올해 3월 두 차례 도핑 양성 반응이 나온 사실이 알려진 것을 떠올리게 하는 말이었다.
그는 또 “고모(또는 이모)가 많이 아프셔서 앞으로 얼마나 우리와 함께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모든 사람이 건강하면 좋겠지만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이 안타깝다”고 덧붙였다.
이날 신네르의 선수 관계자석에는 여자 친구인 안나 칼린스카야(15위·러시아)가 자리해 신네르를 응원했고, 우승 확정 뒤에는 포옹하며 승리를 축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