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 응급실에서 근무하는 의사의 실명을 악의적으로 공개한 ‘블랙리스트’가 등장했다. 정부는 “환자의 생명을 지키는 의사들을 위축시키는 용납할 수 없는 범죄 행위”라며 경찰에 수사를 의뢰했다.
9일 정부와 의료계에 따르면 병원에 복귀한 전공의, 전임의 등의 개인 정보가 담긴 ‘블랙리스트’ 사이트인 ‘감사한 의사’에는 최근 ‘응급실 부역’이라는 이름과 함께 각 병원별 근무 인원이 일부 근무자 명단과 함께 게시됐다.
작성자는 최초 블랙리스트에 실명과 학번, 근무지를 공유한데 이어 최근에는 의사면허, 전화번호, 이메일, 인스타그램과 카카오톡 아이디까지 올리며 ‘저격’을 유도하고 있다.
명단에는 ‘○○○ 선생님 감사합니다. 불법파업을 중단하고 환자 곁을 지키시기로 결심한 것 감사합니다’ 식으로 의사의 실명이 적혀 있다.
또 “복지부 피셜 ‘응급실 의사가 부족한데도 응급의료는 정상가동 중’ 이를 가능하게 큰 도움주신 일급 520만원 근로자분들의 진료정보입니다”, “인근 지역 구급대 및 응급상황에 처한 국민들에게 큰 도움 되리라 생각합니다” 등의 표현도 함께 적혀 있다.
작성자는 명단에 올라간 전공의, 전임의 등에게 사직 후 이를 인증하면 블랙리스트에서 빼주겠다며 ‘협박’을 일삼고 있다.
그러면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 탈모가 왔다”, “미인계로 뽑혀 교수님과 연애” 등 확인되지 않는 정보를 마치 ‘사이버 렉카’ 처럼 퍼트린다.
응급실에 파견됐던 군의관 등에 대한 신상털기 시도는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지난 4일 지역 A 병원에 파견됐던 한 군의관은 메디스태프에 개인 신상이 올라오자 다른 의사들의 협박·따돌림 등이 두려워 출근조차 제대로 못 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달 말 서울 지역 상급종합병원 응급실에 파견 나왔던 본원 출신 한 군의관도 선배 전공의들의 협박에 못 이겨 결국 출근을 포기한 것으로 전해졌다.
최근 정부는 응급의학 전문의들이 포함된 군의관 15명을 응급실 운영에 어려움을 겪는 병원에 보냈으나, 당사자들이 응급실 진료에 대한 부담 등을 호소하면서 모두 응급실 근무를 하지 않고 있다.
정부는 이 사이트에 응급실 근무 의사, 파견 군의관·공보의 등의 신상정보가 공개된 사실을 경찰에 통보하고 수사를 요청할 계획이다.
정윤순 보건복지부 보건의료정책실장은 이날 응급의료 등 비상진료 대응 브리핑에서 “응급실에서 근무하는 의사의 실명을 악의적으로 공개하는 아카이브 형식의 ‘감사한 의사 명단’ 사이트가 진료현장에서 근무하는 의사들의 사기와 근로의욕을 꺾고 있다”며 “이는 환자의 생명을 지키는 의사들을 위축시키는 용납할 수 없는 범죄행위”라고 말했다.
이어 “일부 군의관은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대인기피증까지 겪으며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며 “의료현장에서 성실히 근무하는 의사들을 악의적으로 공개하는 불법행위에 대해서는 수사기관과 협조해 엄단하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과거) 아카이브에 (유포된) 건에 대해서는 수사를 이미 의뢰 했고, 이번에 업데이트 된 부분에 대해서도 경찰에 전달되어 있다”며 “경찰에서 적극적으로 수사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덧붙였다.
한편 의사 파업 장기화에 따라 응급실 의사 부족 등으로 인한 ‘뺑뺑이 사망 사고’가 잇따르고 있다. 지난달 4일 열경련으로 쓰러진 만 2세 여아는 응급실 11곳으로부터 이송 거부를 당한 후 현재까지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지난 5일 광주의 한 학교에서 심정지 상태로 발견된 여대생은 인근 대학병원 응급실 대신 다른 병원으로 이송되는 동안 중태에 빠졌다. 더불어민주당 김한규 의원 역시 지난달 27일 "서울대 의대 출신 부친이 응급실 자리를 찾다 결국 돌아가셨다"고 알리며 상황을 비판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