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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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의료대란 걱정인데… 이번엔 ‘응급실 의사 부역 리스트’

사이트 ‘감사한 의사’ 신상 공개
전공의 외 군의관·교수 대상 확산
“환자들 곁 지켜줘 감사” 비꼬기도
복지부, 경찰에 추가 수사 의뢰

거짓정보 ‘응급실 꿀팁’도 퍼져
“진료받고 싶으면 소송 압박을”

추석 연휴 동안 응급실 위기가 고조될 것이라는 우려가 커지는 가운데 응급실을 지키는 의료진의 실명이 담긴 블랙리스트가 또다시 등장했다. 정부는 응급실 의료진을 조롱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는 범죄행위”로 보고 엄단할 방침이다. 응급실의 환자 거부 사례가 이어지는 가운데 ‘가짜 정보’까지 확산해 혼란을 더하고 있다.

한 상급종합병원에서 의료관계자들이 응급실로 들어가고 있다. 연합뉴스

9일 의료계에 따르면 의사 커뮤니티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는 ‘응급실 대란 꿀팁’이 광범위하게 퍼지고 있다. 내용을 살펴보면 사실상 응급실 의료진을 난처하게 만들어 진료를 받으라는 식이다.

 

글 작성자는 “핵심은 엄청난 중증이 아니라면 119 부르지 말고 차 타고 가면 된다”며 “본인 발로 걸어 들어온 사람은 쫓아내면 진료 거부”라고 주장했다.

 

아울러 “스스로 걸어 들어간 이상 죽거나 후유증이 크게 남으면 병원에 수억, 수십억원대 소송을 걸 수 있고, 형사고발로 압박해 합의금도 최소 5000만원 받을 수 있다”거나 “들어가자마자 녹음기 켜놓고 녹음 중인 것을 보여주고 의료진 명찰을 보고 이름을 다 적어 놓는 모습을 보여주면 된다”고 덧붙였다.

 

조용수 전남대 응급의학과 교수는 SNS에 “일고의 가치도 없는 내용인데 너무 많이 퍼졌다. 응급실 꿀팁은 틀린 정보”라며 “응급실 꿀팁을 진지하게 믿으면 응급실에서 조롱거리가 되기 십상”이라고 지적했다. 조 교수는 특히 ‘철없는 몇몇 사직 전공의들’을 향해 “응급실 꿀팁을 만든 악마가 의사라는 사실에 참담함을 느낀다”며 “아무리 힘들어도 인간으로서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다. 의사로서도 마찬가지”라고 당부했다.

 

추석 연휴에 응급실에서 일하는 의사들을 공개 저격하는 블랙리스트도 등장했다.

구급차에 붙은 병원 선정 지연 안내 9일 서울 시내 한 병원 응급의료센터에 주차된 구급차 내부에 ‘의사 집단행동으로 인해 병원 선정이 지연되고 있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다. 최근 응급실 환자 이송 지연 사태가 빈발하며, 추석 의료대란 우려가 커지고 있다. 연합뉴스

‘감사한 의사 명단’ 사이트에 ‘응급실 부역’이라는 제목으로 오른 명단에는 병원별 근무 인원과 응급실 근무자 100여명의 실명이 올랐다. 실명과 함께 ‘ㅇㅇㅇ선생님 감사합니다. 불법파업을 중단하고 환자 곁은 지키시기로 결심한 것 감사합니다’ 식의 비꼬는 표현도 있다.

 

명단에는 응급실에 파견된 군의관으로 추정되는 의사도 있다. 이들은 실명과 함께 ‘군 복무 중인 와중에도 응급의료를 지켜 주시는 선생님 감사합니다’라거나 ‘8명 중 7명이 지자체로 복귀한 와중에 유일하게 병원에서 쓸모를 인정받아 1개월 더 연장한, 정말 감사한 선생님’이라고 적혔다.

 

감사한 의사 명단 사이트는 이전에도 복귀 전공의 명단이 공개돼 문제가 됐다. 이제는 전공의 공백을 메우는 군의관, 전임의, 교수들까지도 표적이 되고 있다. 휴대전화 번호나 가족·연인 신상정보 등도 공개하고, ‘불륜이 의심된다’거나 ‘싸이코 성향’ 등의 악의적 표현도 서슴지 않는다.

 

정부는 이번 응급실 부역 명단 관련해 추가 수사를 의뢰했다. 정윤순 보건복지부 보건의료정책실장은 이날 응급의료 일일브리핑에서 “감사한 의사 명단 사이트가 진료현장에서 근무하는 의사들의 사기와 근로의욕을 꺾고 있다. 이는 환자의 생명을 지키는 의사들을 위축시키는 행위”라며 “일부 군의관은 이런 사건으로 말미암아 대인기피증까지 겪으며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의료현장에서 성실히 근무하는 의사들을 악의적으로 공개하는 불법행위에 대해 수사기관과 협조해 엄단하겠다”고 했다.

김은식 세브란스병원 전공의 대표(왼쪽)와 한성존 서울아산병원 전공의 대표가 9일 서울 마포구 서울경찰청 광역수사단에서 대한의사협회(의협) 전·현직 간부들의 의료법 위반 방조 혐의 관련 참고인 조사에 참고인 신분으로 출석하고 있다. 뉴스1

경찰은 대한의사협회 전·현직 간부들의 집단 사직 교사 혐의도 수사 중이다. 서울경찰청 공공범죄수사대는 이날 김은식 세브란스병원 전공의 대표와 한성존 서울아산병원 전공의 대표를 참고인 신분으로 불러 조사했다. 이들은 출석하면서 “(집단 사직은) 개개인의 선택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김 대표는 “정부는 초헌법적인 행정명령을 통해 국민의 기본권을 침탈했으며 이로 모자라 법적인 겁박을 자행하고 있다”며 “정부의 부당한 폭압에 굴하지 않겠다”고 주장했다.


조희연·정재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