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연휴 응급실 대란 우려가 커지자 환자들이 정부와 정치권, 의료계에 분통을 터뜨리고 있다.
10일에도 임신 25주 차 고위험 임신부가 제주에서 인천으로 항공 이송된 사례가 알려지는 등 전국 병원의 응급실 위기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
제주도소방안전본부와 제주대학교병원에 따르면 전날 오후 1시 28분쯤 25주 차 쌍둥이 임신부 30대 A씨가 조산 가능성이 있지만 의료진이 부족해 다른 병원으로 긴급 이송이 필요하다는 제주대병원 측 신고가 접수됐다.
중앙119구조본부는 소방헬기를 급파해 A씨와 보호자를 충남지역으로 1차 이송했다. 이어 충남소방헬기를 이용해 A씨를 재차 인천 소재 대학병원으로 옮겼다.
소방당국은 헬기 연료보급 문제로 충남을 경유했다고 설명했다.
A씨는 약 440㎞를 이동한 끝에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제주에서 유일하게 신생아 중환자실을 운영하는 제주대병원은 당시 신생아 중환자실 16개 병상 중 2개 병상 정도 여유가 있었다.
하지만 전공의 집단 파업 사태로 기존 2명씩 서던 당직을 1명만 서면서 의료진 부족으로 A씨를 받지 못하고 병원을 옮기는 전원 조치한 것으로 파악됐다.
제주대병원 신생아 중환자실은 전공의 집단 파업 사태로 기존 5명 중 전공의 1명이 빠지고, 비슷한 시기 개인 사정으로 교수 1명이 사직하면서 전문의 3명만 남았다.
지난 7월 어머니가 교통사고로 두 다리가 골절됐다는 장지헌씨는 “의사와 정부는 환자의 삶이나 고통은 안중에도 없고 알력다툼만 하고 있다”며 “그 속에서 뺑뺑이 문제는 더 심각해지고 있다”고 비판했다. 또 다른 의료사고 피해 유가족 김태현씨는 “응급실은 환자 목숨을 다루는 곳인데, 요즘 보면 환자 생명이 자신의 요구 조건을 관철시키는 수단이 됐다”고 씁쓸해했다. 그는 “사람이 죽어간다면 의료든 정치든 무슨 필요가 있느냐”면서 “응급실 앞에선 모든 걸 화해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김성주 한국중증질환연합회 대표는 “대부분의 국민은 가슴이 터질 듯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며 “그런데 이제 와서 무슨 협의체를 만든다면서 시간을 낭비하려는 건지 모르겠다”고 당장 적용 가능한 대책 마련을 촉구했다.
안기종 한국환자단체연합회 대표는 “응급기관이 환자를 받을 수 없는 상황이더라도 심폐소생술 중인 초응급 환자는 받게 하는 제도와 체계를 만들고, 필요하면 형사책임도 면제해야 한다”며 “5년째 외치고 있는데 아직도 안 되고 있고 응급실 뺑뺑이는 계속해서 발생하고 있다”고 했다.
2020년 봄 아들 동희를 잃은 김소희씨는 이날 환자샤우팅카페 행사에서 “동희는 4년 전 ‘이송 거부’로 하늘나라에 갔다. 이런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정부와 국회, 의료계가 나서서 대책을 마련해달라.”고 호소했다.
김씨는 8개월째 이어지는 의·정 갈등 상황에서 ‘응급실 뺑뺑이’ 사례가 언급될 때마다 동희가 떠올라 괴롭다고 했다. 그는 “동희처럼 심폐소생술을 받으며 119구급차로 이송 중인 초중증 응급환자가 치료받을 병원을 찾지 못해 더 이상 죽는 일이 없도록, 응급실 뺑뺑이라는 부끄러운 단어가 더 이상 언론에 나오지 않도록 정부와 국회가 적극적으로 나서주시길 바란다”고 촉구했다.
평소 고열을 앓던 동희는 2019년 10월 편도 수술 후 2차병원에서 입원 치료 이틀째에 출혈이 심해 응급차에 올랐지만, 원래 수술한 병원에서 이송을 거부당했다. 동희는 20㎞ 떨어진 다른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지만 처치가 늦어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 채 5개월을 버티다 부모 곁을 떠났다.
응급실 위기가 고조되자 국민의힘 한동훈 대표는 이날 국회에서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여야의정 협의체 의제에 제한을 두지 않겠다는 뜻을 밝히며 의료계의 협의체 참여를 요청했다.
한 대표는 의료계가 요구하는 ‘2025년 증원 백지화’, ‘장·차관 경질’도 논의할 수 있는지 묻는 질문에 “모여서 무슨 이야기를 못하겠나. 대화할 수 있는 것 아닌가”라고 말했다. ‘2025학년도 증원 재검토가 불가능하다는 기존 입장이 바뀐 것이냐’는 질문에는 “제가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중요한가”라며 “의료계가 여러 생각이 있겠지만 참여해서 대화해주면 좋겠다는 간곡한 부탁을 드리는 것”이라고 답했다.
한편 대통령실 고위관계자는 ‘응급실 의사 블랙리스트’에 대해 “선의로 복귀한 의료진이 일을 못 하게 하는 의도가 불순한 것으로 엄정하게 대응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국민에게 그 피해가 고스란히 돌아가므로 절대 용납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보건복지부도 “선배·동료 의사들이 일부 의사의 부적절한 행동 바로잡아달라”며 자정 노력을 촉구했다. 경찰은 응급실에서 진료 중인 의사들 실명을 아카이브(정보 기록소)에 공개한 1명과 해당 아카이브 접속 링크를 게시한 3명 등 4명을 입건해 수사 중이라고 밝혔다.
응급실 의료공백은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이 4∼9일 국립대병원 7곳과 사립대병원 23곳 등 65곳 의료기관의 노조 지부를 설문조사한 결과, 42곳(64.6%)은 “의료공백이 발생하고 있다”고 답했다. 응급실 가동에 대해선 36곳(55.3%)이 “겨우겨우 버티고 있지만 불안하다”고 했고, 3곳은 “무너지기 직전이고 더 오래 버틸 수 없는 지경”이라고 했다. 응급실 가동률이 2월 전공의 집단사직 이전에 비해 떨어졌다는 곳은 33곳(50.7%)이었다.
강원대병원에 파견된 군의관들은 현장에서 근무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강원대병원 관계자는 이날 “파견 군의관 6명이 응급실 경험이 부족하고 환자들에게 되레 위해가 될 수 있다는 점 등을 이유로 현장에서 근무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고 전했다. 강원대병원은 강원도에 ‘군의관들이 부대 복귀를 원한다’는 공문을 발송하고, 의료공백 최소화를 위해 대체 인력을 파견해달라고 요청했다.
부산 지역의 동아대병원(8명), 부산광역응급의료상황실(4명), 인제대해운대백병원(2명)에 전날 파견된 군의관 14명 중 9명도 “일을 하기 어렵다”며 출근을 거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