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발생한 이란 수도 테헤란 주재 미국 대사관 인질 사건 당시 중앙정보국(CIA) 요원들이 미국 외교관 6명을 이란 당국 몰래 국외로 탈출시킨 일명 ‘아르고’ 작전은 2012년 같은 이름의 할리우드 영화로 만들어져 커다란 성공을 거뒀다. 당시 작전에 투입된 CIA 요원 2명 가운데 토니 멘데즈(2019년 사망)의 이름과 얼굴은 오래 전 세상에 알려졌으나, 나머지 1명이 누구인지는 베일 뒤에 가려졌다. 2023년에야 처음 이름이 공개된 전 CIA 요원 에드워드 존슨이 9일(현지시간) 81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다만 고인의 얼굴은 여전히 비밀에 부쳐졌다.
이날 BBC 방송에 따르면 CIA는 성명에서 “존슨의 유산은 향후 몇 세대에 걸쳐 CIA 요원들에게 영감을 줄 것”이라며 고인을 추모했다. 유족은 입장문에서 “전 세계가 고인의 영웅적 행위를 칭찬하는 동안에도 정작 고인은 익명성에 가려진 유령으로 남아야 했다”며 “수십년간 고인의 정체는 철저히 비밀이었고, 인생의 황혼기가 되어서야 마침내 음지에서 벗어났다“는 문구로 고인의 삶을 기렸다. 1995년 CIA에서 퇴직한 고인은 말년에 알츠하이머병을 앓았으며 직접적 사인은 폐렴 관련 합병증인 것으로 전해졌다.
존슨은 1943년 뉴욕 브루클린에서 태어났다. 베트남 전쟁 기간 육군에서 복무한 그는 사우디아라비아로 이주해 영어 교사로 일하다가 1971년에는 프랑스 소르본 대학에서 프랑스어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그의 경력에 관해선 알려진 사실이 거의 없는데 CIA에 입사했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CIA에 의하면 고인은 기술 부서에서 근무하며 기계 설계, 무기 구입, 위장, 문서 위·변조 등 업무를 맡았다. 이를 통해 CIA가 전 세계에서 벌이는 각종 비밀 작전 수행을 지원했다고 한다.
1979년 이란에서 호메이니가 일으킨 이슬람 원리주의 혁명으로 친미 성향의 팔레비 왕조가 무너졌다. 고인은 바로 그 시점에 중동에 파견된 것으로 보인다. 과거 사우디에서 체류한 경험 그리고 유창한 외국어 실력 때문이었다. 그해 11월 혁명 정부를 지지하고 미국을 적대시하는 이란 청년들이 미국 대사관에 난입해 직원 수십명을 인질로 잡는 충격적인 사태가 벌어졌다. 당시 미국 외교관 6명은 이란인들이 점거한 대사관을 빠져나와 캐나다 대사관으로 피신했다. 그들은 이듬해인 1980년 1월까지 캐나다 대사관에 머물렀다.
CIA는 이란 당국 몰래 이들을 구출할 계획을 세웠다. ‘캐나다 페이퍼’라는 이름이 붙은 이 작전은 할리우드 영화 ‘스타워즈’ 번외편 제작자로 위장한 CIA 요원들을 캐나다 대사관에 들여보내 그곳에 갇힌 미국 외교관들에게 위조 여권 등을 제공한다는 것이 핵심이었다. 당시만 해도 1978년 개봉한 ‘스타워즈 : 새로운 희망’이 전 세계적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 때였다. 번외편 영화에 붙여진 가제가 ‘아르고’였기 때문에 훗날 아르고 작전으로 불리게 됐다.
멘데즈와 존슨은 1980년 1월25일 이란에 입국했다. 이란 당국은 이들의 정체를 까맣게 몰랐다. 캐나다 대사관에 들어간 두 사람은 미국 외교관들에게 행동 요령을 전달했다. 일행 전체가 영화 제작진인 것처럼 보이게 하려고 미리 만들어 간 가짜 영화 대본까지 건네며 최대한 자연스럽게 연기할 것을 주문했다. 사흘 뒤인 1980년 1월28일 그들은 영화 촬영과 관련해 이란에서 볼 일을 전부 마친 것처럼 가장하며 이미 준비된 위조 여권으로 스위스항공 여객기에 탑승했다. 작전 성공으로 존슨은 CIA 내부에서 두 번째로 높은 등급의 공로상을 받았다고 한다.
이 놀라운 사연은 2012년 할리우드 영화 ‘아르고’로 재탄생했다. 벤 애플렉이 감독과 주연을 맡았는데 그가 연기한 인물은 다름아닌 멘데즈였다. 영화에서도 존슨의 존재와 역할은 가려진 셈이다. 아르고는 개봉 이듬해인 2013년 아카데미 영화상 시상식에서 작품상, 편집상, 각색상 3개 부문을 수상하는 쾌거를 이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