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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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가만난세상] 그리스서 마주한 기후위기

이달 초 휴가차 찾은 그리스 아테네. 1896년 최초의 근대올림픽이 열린 파나티나이코 경기장을 관람하던 중 순식간에 몰려온 먹구름과 함께 폭우가 쏟아졌다. 수십 명의 관람객이 허둥지둥 비를 피해 지하 통로로 피신하다가 비에 젖은 생쥐 꼴이 됐다. 예고에 없던 비였기에 우산을 꺼내 드는 이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리스에서 가장 큰 섬인 크레타에서도 갑작스러운 천둥·번개와 거센 비를 만났다. 화창하기 그지없던 날씨에 부러 실내가 아닌 테라스에 앉아 아침을 먹던 중 빗방울이 들이닥쳤다. 호텔 직원은 “(건기인) 여름에 이렇게 비가 오는 건 매우 드문 일”이라고 말했다.

이지안 국제부 기자

그리스와 같은 지중해 국가는 기후위기의 ‘최전선’이다. 전례 없는 폭우, 폭염, 가뭄 등 이상기후가 이어지고 있다. 습도 높은 동남아의 스콜(열대성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폭우를 보며 여름철에는 건조한 지중해성 기후도 이제는 옛말이 되어간다고 느꼈다.

그리스의 지난 6∼7월은 ‘역대 가장 더운 여름’으로도 기록됐다. 오죽하면 관광업으로 먹고사는 그리스가 대표 관광지인 아크로폴리스를 임시 폐쇄하기도 했다. 40도가 넘는 땡볕에 그늘이 부족한 아크로폴리스에서 관광객들이 탈수와 열사병으로 쓰러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9월의 때늦은 ‘가을 폭염’은 먼 나라 유럽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제 좀 시원해졌을까’ 기대하며 돌아온 서울에서 사상 첫 9월 폭염 경보가 발령됐다. 추석을 앞두고도 에어컨 없이는 잠 못 드는 열대야라니. 기후위기는 전 지구가 맞닥뜨린 현실이라는 것을 체감했다.

지구촌 전역이 힘을 합쳐 기후위기에 대응해야 하는 시점임이 분명하다. 문제는 여전히 시급성을 느끼지 못하는, 혹은 느끼고 있음에도 회피하는 ‘기후악당’ 국가들이다.

지난해 기준 전 세계 화석연료 소비량 2위인 미국의 대선주자 첫 TV 토론에서도 90분간의 열띤 공방 속에서 ‘기후’(Climate)라는 단어는 단 4번 언급되는 데 그쳤다. 평소 지구온난화를 ‘사기극’(Hoax)이라고 주장해 온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기후위기 대응책에 관한 질문에 횡설수설하는 답변을 늘어놓으며 회피했고, “기후위기는 현실”이라는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마저 한때 환경오염 우려로 반대했던 프래킹(fracking·셰일가스를 시추하는 수압파쇄법)을 “금지하지 않겠다”고 못 박았다.

‘기후악당국’ 중 하나로 꼽히는 한국 정부와 정치권도 그동안 기후위기 대응을 뒷전으로 밀어놓았다. 국제에너지기구(IEA) 조사에 따르면 한국 재생에너지 발전 비중은 지난 5월 기준 14.4%로, 조사대상국 중 최하위였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유럽 회원국 평균(57.6%)에 비하면 턱없이 낮은 수치다.

그나마 최근 국회에서 기후특위 상설화를 위한 움직임이 진척을 보이고 있다. 더 나아가 기후위기 대응 전담 부처 신설도 추진력을 얻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일찍이 2021년 기후위기부를 창설한 그리스의 키리아코스 미초타키스 총리는 지난해 “지금은 평화의 시대이지만, 우리는 기후위기라는 전쟁에 직면해 있다”고 선언했다. 우리 정부에게도 필요한 문제 인식이 아닐까.


이지안 국제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