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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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작 되려고 가문 후계자 8명 연쇄 살인…그런데 무섭지 않고 웃기다

코미디 뮤지컬 ‘젠틀맨스 가이드’…누군가 죽을 때마다 웃게 되는 이상한(?) 공연
정상훈 등 ‘다이스퀴스’ 역 배우들 1인 9역 소화…기발한 변신과 죽음에 폭소
인간의 욕망과 위선적인 사회 풍자하는 블랙 코미디

1900년대 초반 영국 런던. 어머니 장례를 치르고 혼자가 된 가난한 청년 ‘몬티 나바로’는 어느날 솔깃한 말을 듣는다. 어머니가 원래 부유하고 명망있는 ‘다이스퀴스’ 귀족 가문 출신인데 별 볼 일 없는 남자(몬티 아버지)와 사랑에 빠져 집안에서 쫓겨났다고. 따라서 자신도 다이스퀴스 혈통이며, 이 가문의 후계자란 사실이다. 문제는 자신보다 서열이 높은 후계자가 8명이나 돼 가문의 하이허스트 성 주인인 백작이 될 가망이 없다는 것. 어머니가 생전에 다이스퀴스 집안 사람들로부터 비참한 대우를 받았음을 알게 된 몬티는 결심한다. 선순위 후계자 8명을 제거하고 백작 자리를 차지하기로. 

 

뮤지컬 ‘젠틀맨스 가이드 : 사랑과 살인 편’ 공연 장면. 쇼노트 제공

서울 강남구 광림아트센터 BBCH홀에서 공연 중인 뮤지컬 ‘젠틀맨스 가이드 : 사랑과 살인 편’(이하 ‘젠틀맨스 가이드’)의 줄거리다.

 

얼핏 보면 탐욕에 눈먼 청년의 연쇄 살인 행각을 다룬 심각한 이야기 같지만 공연 내내 객석에서 웃음이 끊이지 않는다. 다이스퀴스 자손들이 비명횡사하는 과정을 기발하고 유쾌하게 그려 블랙 코미디(잔혹함, 부조리, 죽음 등 어두운 소재를 익살스럽게 다룬 희극)의 진수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젠틀맨스 가이드’는 로버트 L.프리드먼(대본·작사)과 스티븐 루트백(작곡)이 영국 작가 로이 호니만(1874∼1930) 소설 ‘이스라엘 랭크: 범죄자의 자서전’을 바탕으로 2013년 뉴욕 브로드웨이 무대에 선보였다. 인간의 탐욕과 위선적인 사회에 대한 통찰과 풍자를 녹여낸 작품이다. 유기적인 서사 구조와 빠른 전개, 개성 넘치는 캐릭터 묘사, 재기 발랄한 무대 연출 등으로 평단과 관객을 사로잡았다. 이듬해 미국 공연계 최고 권위의 토니어워즈에서 최우수 뮤지컬상과 극본상 등 4관왕에 오르고, 드라마데스크어워즈 7관왕, 외부비평가상 4관왕, 드라마리그어워즈 최우수 뮤지컬상을 수상하며 양질의 코미디 뮤지컬로 자리매김했다. 한국에선 2018년 초연했고, 2020년과 2021년에 이어 올해 네 번째 시즌으로 돌아왔다.

 

이야기 자체가 흥미롭고 재미있지만 볼거리도 많다. 특히, 혼자서 아홉 인물을 소화하는 다이스퀴스 역 배우는 물론 앙상블 배우들까지 순간 순간 다른 인물로 변신해 연기하는 것을 보는 게 큰 묘미 중 하나다. 

 

지난 14일 저녁 공연에서 다이스퀴스 역으로 출연한 정상훈만 해도, 성직자와 은행장, 은행장 아들, 시골 대지주, 자선사업가, 보디빌더, 백작, 여배우 등 각기 다른 다이스퀴스 가문 사람들로 잇따라 변신한 후 ‘웃기게’ 죽는 장면을 감칠맛 나게 연기했다. 다이스퀴스마다의 특성에 맞게  의상, 가발, 분장 등을 빠르게 바꾸고 등장하는 ‘퀵 체인지(Quick Change)’와 적절하게 터트리는 애드리브(즉흥 대사·연기)도 관객에게 웃음을 선사했다. 

 

정상훈은 앞서 기자간담회와 프레스콜 당시 “다이스퀴스의 퀵체인지가 쉽지 않다. 짧게는 15초 안에 의상을 갈아입어야 하기에 분장 스태프들과 함께 안무 연습을 하듯이 ‘퀵체인지’ 연습을 했다”고 말했다. 이어 “(빨리 갈아 입어야 한는데) 여름이다 보니 팔에 땀이 많아져 의상이 안 들어가 5~6초 정도 늦어지더라”며 “예전 다역 경험을 통해 팔 토시가 생각났다. 그걸 착용한 이후 옷이 쑥쑥 잘 들어가 다른 다이스퀴스도 다 팔토시를 사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상훈과 함께 정문성, 이규형, 안세하(최근 학교폭력 의혹 논란으로 하차)가 다이스퀴스 역을 번갈아 연기한다. 

 

정상훈은 “새로운 (다이스퀴스) 캐릭터로 등장했을 때 관객이 10초 안에 그 성격과 특성을 이해하도록 만드는 것을 목표로 연기한다”고도 했다. 실제 그는 변신한 인물의 맞는 목소리 높낮이와 음색, 몸짓, 자세 등에 차이를 두는 연기로 관객들이 자연스럽게 몰입할 수 있도록 했다.

 

몬티가 세속적 욕망을 지닌 매혹적인 연인 시벨라 홀워드, 다이스퀴스 가문의 참한 여인 피비 다이스퀴스와 삼각 관계에 빠져 갈팡질팡하는 이야기도 극의 한 축이다. 몬티 역은 송원근·김범·손우현이, 시벨라 역은 허혜진·류인아, 피비 역은 김아선·이지수가 각각 맡는다. 앙상블 배우들의 활약도 좋다. 이 중 장예원이 극 후반부에 백작 애덜버트 다이스퀴스 경의 부인 레이디 유지니아 다이스퀴스로 변신해 보여주는 연기가 일품이다. LED 스크린을 활용해 3D 입체책처럼 펼쳐낸 영상과 오케스트라를 무대 위에 배치한 연출도 보는 재미를 배가시킨다. 공연은 10월 20일까지.


이강은 선임기자 kelee@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