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사찰은 대부분 산과 함께한다. 그래서 사찰 경내로 들어서는 첫 번째 문인 일주문에는 ‘OO山 OO寺’라고 적혀 있다. 우리나라 산사(山寺)가 한국 고유의 독창적인 문화를 지니고 있다는 건 2018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7곳의 산사가 등재되면서 공인됐다. 순천의 선암사도 그중 하나다.
흔히 집이나 재산 없이 여기저기 떠돌아다닐 때 “집도 절도 없다”라는 속담을 쓴다. 달리 말하면 오갈 데 없는 사람들이 의지하는 최후의 장소가 절이라는 얘기다. 그래서 절은 언제나 개방돼 있다. 하지만 절은 엄연히 속(俗)의 세계와 구별되는 성(聖)의 세계다. 그렇기에 절은 모든 사람에게 항상 열려 있는 듯하지만 동시에 아무나 쉽게 들어올 수 없는 영역을 이루어야 한다. 이런 모순적인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고안된 장치가 본당으로 가는 과정에서 거쳐야 하는 여러 개의 문(門)이다. 일반적으로 속의 세계에서 본당까지 가는 동안 일주문(一柱門)-천왕문(天王門)-불이문(不二門)을 지나게 된다. 신자들은 문을 하나하나 통과해 본당에 이르는 동안 세속의 욕망과 번뇌를 벗어낸다. 그래서 절의 배치는 내향적이고 점층적이며, 진입 방향을 따라 길다.
문제는 절이 지향하는 이상적인 배치가 이루어지기에는 산이라는 땅은 제약조건이 심하다는 점이다. 산은 지형적으로 평평하기보다 경사져 있어 건물이 들어서기에 알맞은 땅을 확보하기가 쉽지 않다. 이상적인 원칙과 현실적인 제약이 부딪칠 때 이를 풀어내는 방법은 원칙에 맞게 현실을 가능한 한 이상적으로 바꾸거나 아니면 현실에 맞게 원칙을 변형하는 것이다. 전자의 방식을 따른 대표적인 예가 경주의 불국사다. 하지만 대부분은 후자의 방식을 따라 절이 놓이는 지형과 지세를 고려해 가람 배치를 적절히 조정했다. 선암사도 마찬가지다.
선암사가 있는 땅은 조계산 동쪽 불당골인데, 종축과 횡축의 길이가 200m 내외로 비슷하다. 그래서 진입 방향을 따라 세 개의 문을 배치하기에는 길이가 짧다. 이런 상황을 고려해 입구에서 일주문까지의 산길에 승선교, 강선루, 삼인당을 두어 일주문으로 들어오기 전에 이미 경내에 들어온 듯한 인상을 준다. 그리고 일주문 다음에 있어야 할 천왕문을 배치하지 않았다. 대신 주산(主山)이 되는 장군봉이 악귀의 범접을 막는 천왕문의 역할을 대신한다.
선암사 입구에서 일주문까지 이르는 1.3㎞ 정도의 길은 우리나라의 산사 건축이 진입로부터 시작된다는 말을 확인케 해준다. 길을 따라 걸으면 가장 먼저 무지개 모양의 아치가 또렷한 승선교가 나온다. 승선교는 정유재란 때 소실된 선암사를 중건한 호암 선사가 1698년에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승선교는 바로 뒤에 있는 강선루와 함께 짝을 이루어 환상적인 풍경을 자아내는데, 신선이 내려왔다 올라갔다는 뜻의 ‘강선(降仙)’과 ‘승선(昇仙)’이라는 이름만으로도 그 풍경을 짐작할 수 있다. 강선루를 지날 때는 옆으로 난 찻길이 아닌 누마루 아랫길을 이용할 것을 추천한다. 그래야 강선루를 받치는 네 기둥 중 하나의 주춧돌이 계곡 아래까지 내려가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조계산 동쪽 계곡의 물을 모았다가 하류로 흘려보냈던 삼인당(三印塘)을 지나면 ‘조계산선암사(曹溪山仙巖寺)’라는 현판이 걸린 일주문이 나온다. 일주문의 첫 번째 특이한 점은 두툼한 양쪽 기둥 옆에 담이 이어져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담은 양쪽으로 계속 이어져 있지 않고 짧게 끊어져 있다. 이유를 추측해 보면 일주문 뒤로 범종루와 경내의 전경이 바로 나오는 상황을 꺼려 안쪽으로 향하는 시선을 차단하기 위함인 듯하다.
일주문의 두 번째 특이한 점은 문 뒤에 ‘고청량산해천사(古淸凉山海川寺)’라고 적힌 현판이 하나 더 걸려 있다는 것이다. 사연은 과거부터 화재가 자주 일어난 선암사의 지기와 관련돼 있다. 1761년 상월당 스님은 땅의 화기를 누르기 위해 산과 절의 이름을 모두 물과 관련된 ‘청량산’과 ‘해천사’로 바꿨다. 하지만 상월당 스님의 노고가 무색하게도 이후 크고 작은 화재가 잇따랐고 결국 1825년에 원래 이름으로 다시 바꾸었다.
선암사 곳곳에서 땅의 화기를 누르기 위한 다양한 시도를 찾을 수 있다. 가장 먼저 선암사에는 불을 밝히는 장치인 석등이 없다. 두 번째는 선암사의 부엌인 심검당의 환기 구멍에 ‘水’(수)와 ‘海’(해)를 새겨 넣었다. 아무래도 부엌에서는 불을 쓸 수밖에 없으니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한 목적이다. 마지막으로 선암사 곳곳에 물을 담아두는 못을 여섯 개나 두었다. 소방 용수로 사용하기 위해서다.
일주문을 지나 범종루 아래를 통과해 들어오면 ‘육조고사(六朝古寺)’라고 쓴 현판이 걸린 만세루(萬世樓)가 나온다. 건물 이름에 누각을 일컫는 글자 ‘樓’(루)가 쓰였음에도 그 모습은 누각이 아니다. 만세루는 선암사의 본당인 대웅전으로 가는 마지막 문인 불이문의 역할을 한다. 일반적으로 불이문(또는 해탈문)은 누각의 형태로 지어져 그 아래로 진입이 이루어진다. 어두운 누각 아래를 지나 마당으로 진입할 때 갑자기 대웅전을 보게 되는 과정은 ‘깨달음은 벼락 치듯 온다’라는 ‘돈교(頓敎)’를 상징한다. 반면, 선암사의 만세루처럼 건물의 모서리를 지나 옆에서부터 대웅전을 천천히 보는 과정은 ‘깨달음은 조금씩, 은근히, 소박하게 온다’라는 ‘점교(漸敎)’를 뜻한다. 불교에서는 이 두 과정을 합쳐 ‘돈점이교’라고 부른다.
어느 쪽이 됐든 만세루 옆을 지나 쌍탑이 있는 중정으로 들어서면 대웅전을 마주하게 된다. 대웅전은 선암사의 본당이지만 다른 건물을 압도할 만큼 화려하거나 크지 않다. 무엇보다 대웅전은 선암사로 들어오는 여정의 끝이 아니다. 오히려 대웅전 뒤편에 있는 또 다른 영역으로 가는 시작점이 된다.
선암사를 방문한 사람들은 석가모니불이 모셔진 대웅전보다 각자에게 더 아름답거나 의미 있게 느껴지는 장소를 찾아간다. 그곳이 누군가에게는 기도 효험이 좋다는 원통전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선암사의 지기를 어루만지는 역할을 한다는 각황전일 수도 있으며,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선암사의 슈퍼스타 청매화나 뒷간일 수도 있다. 선암사를 다녀온 사람들은 여러 건물이 각자의 질서를 가지고 옹기종기 모여 있는 모습을 통해 ‘오래된 마을’, ‘수도자의 도시’를 떠올린다. 아마도 선암사와 같은 동네가 있다면 그 동네에서는 우리가 꿈꾸는 도시처럼 각자가 가장 가고 싶은 곳을 원할 때 갈 수 있을 것이다.
방승환 도시건축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