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바논 이슬람 무장정파 헤즈볼라 대원들에게 지급된 무선기기 연쇄 폭발과 관련해 이스라엘 정보기관들의 개입 가능성이 속속 제기되고 있다. 이스라엘 해외 정보기관인 모사드와 이스라엘군 내 비밀 첩보 기관인 8200부대 등이 유력한 것으로 지목되고 있다.
18일(현지시간) 로이터통신 등에 따르면 레바논 고위 안보 소식통은 모사드가 이들 무선기기에 소량의 폭발물을 심는 방식으로 폭발 사건에 개입했다고 주장했다. 서방 안보 소식통은 이스라엘군 비밀 첩보기관 8200부대가 1년 이상의 시간이 소요된 이번 작전에 개입했다고 귀띔하기도 했다. 무선기기 생산 단계에서 폭약을 장착할 수 있는지를 시험하는 기술적 측면에 8200부대가 개입했다는 것이 소식통의 설명이다. 8200부대는 이스라엘과 점령지인 팔레스타인 요르단강 서안, 가자지구 등을 대상으로 신호 정보 감청은 물론 암호화, 방첩, 사이버전, 군 정보수집 및 정찰 등 다양한 임무를 수행한다.
레바논에서는 지난 17일 수도 베이루트 남쪽 교외, 이스라엘 접경지인 남부, 동부 베카밸리 등 헤즈볼라의 주요 거점을 중심으로 무선호출기(삐삐) 수천대가 동시다발로 폭발해 어린이 2명을 포함해 12명이 사망하고 3000여명이 부상을 입었다. 18일에는 레바논 동부 베카밸리와 베이루트 외곽 다히예 등지에서 헤즈볼라가 사용하는 휴대용 무전기(워키토키)가 연쇄 폭발하며 최소 20명이 숨지고 450명이 다쳤다. 알자지라 통신은 그 외에도 휴대전화, 노트북, 지문인식장치 등 다양한 전자기기가 폭발했다고 보도했다. 로이터는 레바논 국영 통신사를 인용해 베이루트 곳곳과 레바논 남부 도시 티레 등에서 태양전지가 폭발해 최소 1명이 부상했다고 전했다.
무전기에는 일본 통신기기 제조사 ‘ICOM’(아이콤)의 라벨이 붙어 있었다고 로이터통신이 보도했다. 아이콤 측은 폭발한 무전기가 자사 제품이 아니라 가짜일 가능성이 있다면서 사실관계를 확인하겠다는 입장이다. NYT는 사진·영상 분석을 토대로 이날 무전기 폭발의 위력이 전날 호출기 폭발보다 더 강했을 수 있다고 추정하기도 했다.
헤즈볼라는 지난 2월 수장 하산 나스랄라가 ‘이스라엘의 위치 추적과 표적 공격에 활용될 수 있다’며 휴대전화를 쓰지 말라고 경고한 이후 최근 몇 달간 통신보안을 위해 무선호출기를 도입했고, 무전기도 5개월 전 삐삐와 비슷한 시기에 구입했다. 이를 감안하면 이번 폭발 공격은 수개월 전부터 치밀하게 준비된 것으로 보인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폭발을 일으켰다고 인정하지 않고 있지만 사건 개입 가능성을 시사하는 발언은 속속 나오는 중이다. 요아브 갈란트 이스라엘 국방부 장관이 전날 북부에 있는 라맛 다비드 공군기지를 방문해 “나는 우리가 새로운 전쟁 단계의 시작점에 있다고 믿는다. 우리는 적응해야 한다”고 강조한 발언을 외신들은 호출기와 무전기 폭발 개입 시사로 해석하는 중이다.
이스라엘의 개입 가능성이 커지는 가운데 국제사회의 비난도 확산하고 있다. 일상에서 사용하는 무선기기가 ‘죽음의 무기’로 돌변해 민간인의 피해로 이어질 가능성이 큰 탓이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무선기기 동시 폭발과 관련해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이 모든 장비 폭발을 만든 논리는 분명히 주요 군사 작전에 앞서 선제공격을 위한 것”이라고 규정하며 “민간이 사용하는 물건이 무기가 되지 않도록 민간 물건을 효과적으로 통제하는 게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폴커 튀르크 유엔 인권최고대표도 “폭발 사건은 충격적이며 민간인 피해가 발생한 점에서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며 “이스라엘과 헤즈볼라 간 갈등이 더 확산하지 않도록 즉각적 조처를 하고 민간인 보호를 최우선으로 삼아야 한다”라고 밝혔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20일 긴급회의를 개최하기로 했다. 이 자리에서 이번 무선기기 연쇄 폭발 사건에 대한 서구의 대응이 구체화될 것으로 전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