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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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리스트 작성’ 전공의 구속에… 의료계 “북한 수준의 인권 유린”

의협 회장 “구속된 전공의도 피해자, 도와야”

전공의들의 집단행동에 동참하지 않은 동료의 신상을 담은 ‘의료계 블랙리스트’ 작성·유포 혐의로 사직 전공의 정모씨가 구속되자 의료계 일각에서 인권 유린이라고 반발하고 있다. 전공의 사태 초기부터 블랙리스트가 떠돌자 의료계 내부에서도 자성의 목소리가 나왔지만, 정작 첫 구속 사례가 나오자 “정씨도 피해자이니 도와야한다”는 여론이 빠르게 형성되고 있다.

 

임현택 대한의사협회 회장이 지난 21일 서울 성북구 성북경찰서에서 '의료계 블랙리스트' 작성 혐의로 구속된 전공의 면회를 마친 후 입장을 밝히고 있다. 뉴시스

22일 의료계 등에 따르면 전공의 집단이탈 등에 참여하지 않은 의사들 신상 정보를 담은 ‘의료계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게시한 사직 전공의 정모씨가 스토킹처벌법 위반 혐의로 20일 구속된 뒤 의료계에선 정씨에 대한 동정론이나 정부 책임론이 확산하고 있다.

 

임현택 대한의사협회(의협) 회장은 전날 서울 성북경찰서에서 정씨를 면회한 뒤 취재진에게 정씨를 ‘피해자’로 지칭하면서 “철창 안에 있는 전공의나 리스트에 올라 피해를 당한 전공의나 그 누구라도 돕겠다는 게 협회의 입장”이라고 강조했다. 임 회장은 “구속된 전공의와 리스트에 올라 피해를 입은 분들 모두가 정부가 만든 피해자”라며 “정부가 의사들 사이를 다 결딴내고 있다”고 주장했다.

 

경기도의사회은 전날 서울 이태원 인근에서 ‘전공의 구속 인권 유린 규탄’을 주제로 집회를 열었다. 블랙리스트를 유포한 전공의를 구속한 것을 인권 유린으로 규정한 것이다. 경기도의사회는 “투쟁과 의사표현의 자유는 자유민주국가의 기본 요소이고 이런 정도의 소극적 의사 표현조차 말살하는 것은 북한 수준의 인권 유린”이라고 주장했다.

 

의료계 집단행동에 동참하지 않은 의사·의대생의 신상 정보가 담긴 블랙리스트 '감사한 의사'를 유포한 사직 전공의 정 모씨가 지난 20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을 마친 뒤 경찰과 함께 이동하고 있다. 뉴스1

서울시의사회도 성명에서 블랙리스트 유포를 “정부의 초법적 조치에 대한 저항 수단”이라고 규정하고 “앞에서는 대화를 청하면서 뒤로는 검경을 통해 겁박하는 것이 현 정부의 행태”라고 했다.

 

전라북도의사회도 성명에서 “의료계 블랙리스트 사건은 의료 공백을 막기 위해 노력해 온 의사들의 명단을 공개하는 행위를 범죄로 몰아가는 공안 통치의 전형으로, 민주주의의 기본적인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행위”라고 주장했다.

 

의료계에선 한때 블랙리스트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가 높았지만 정씨 구속으로 여론이 정부 비판으로 돌아서고 있다.

 

강희경 서울대 의과대학·서울대병원 교수 비상대책위원회 위원장은 블랙리스트와 관련해 15일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의사 블랙리스트’를 만들고 배포하시는 분들은 스스로 얼마나 부끄러운 일을 하고 있는지 깊이 생각해보시기 바란다”며 “블랙리스트의 존재는 전공의들의 사직이 개인의 선택에 의한 것임을 의심하게 한다”고 지적했다. 이어 “당신들의 행동이 정부의 폭압과는 다르다고,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커다란 착각”이라며 “의사 집단을 범죄자 집단으로 여겨지게 할 뿐이며 다른 이들이 우리의 이야기에 귀를 닫게 할 뿐”이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강 교수는 전날 정씨 구속을 ‘의정갈등 첫 구속 사례’라고 표현한 기사를 언급하고 “의정갈등 첫 구속? 온라인 집단 괴롭힘 가해자의 구속이 아니고?”라며 “적법한 구속이기는 한 것일까?”라고 의문을 제기했다.

 

노환규 전 의협 회장도 전날 SNS에 “정모씨의 행동은 그 취지가 마녀사냥과 다름없다는 점에서 비판받아 마땅하다”면서도 도주와 증거인멸 우려가 없는데도 구속한 것은 문제가 있다는 취지의 글을 덧붙였다. 의사 커뮤니티에서도 구속된 정씨를 두둔하거나 그를 돕자는 취지의 글들이 잇따르고 있다.

 

정부는 “블랙리스트는 환자 곁을 지키는 의료진들에 대한 조롱과 모욕이며, 개인의 자유의사를 사실상 박탈하는 비겁한 행위”라며 엄정 대응하겠다는 입장이다. 보건복지부는 그동안 블랙리스트를 유포하거나 근무 중인 의사를 공개 비방한 43건을 수사 의뢰하고, 수사 기관이 32명을 검찰에 송치했다고 최근 밝혔다.


정재영 기자 sisleyj@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