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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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차례 투옥에도 유공자 마다한 ‘재야 운동권 대부’ [고인을 기리며]

장기표 신문명정책연구원 원장

전태일 분신 이후 노동운동 헌신
“대가 바란 일 아냐” 배상금도 거부

총선 잇단 고배, 제도권 진출 실패
국회의원 특권 폐지 등 앞장서기도
尹대통령 “시대 지킨 진정한 귀감”

‘영원한 재야(在野)’로 불린 장기표 신문명정책연구원장이 22일 오전 1시35분쯤 소천했다. 향년 78세.

 

1945년 경남 밀양군에서 태어난 장 원장은 밀양과 마산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1966년 서울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한 그는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에 투신했다.

22일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장기표 신문명정책연구원 원장 빈소에서 조문객이 조문하고 있다. 연합뉴스

1970년 11월 전태일 열사 분신 이후 모친 이소선 여사를 만나 서울대 학생장을 제의했다. 이 여사는 이 자리에서 “우리 태일이가 그토록 대학생 친구 갖기를 바랐는데 죽고 나서야 나타나느냐”고 한탄했다고 한다. 장 원장은 이후 전태일에 대한 자료를 수집해 조영래 변호사에게 전달, ‘전태일평전’을 만드는 데 기여했다.

 

1971년에는 김근태 전 열린우리당 의장, 조 변호사와 함께 서울대생 내란음모 사건으로 재판을 받았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도 만나 ‘김대중납치사건규탄’ 활동에도 참여했고 1974년에는 민청학련 사건으로 수배됐다. 1986년 대통령직선제 개헌운동, ‘개헌현판식’ 투쟁을 지휘하다 구속됐다.

 

1990년에는 재야운동 또한 제도권 내 활동이 필요하다는 인식에 이우재, 이재오, 김문수 등과 함께 민중당을 창당하였다. 제도권 정치 진출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그는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를 시작으로 15·16대 총선, 2002년 재보궐 선거, 이어 17·19·21대까지 총 7차례 선거에서 모두 떨어졌다. 21대 총선에서는 보수정당(미래통합당) 후보로까지 옮겨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영원한 재야’라는 별명을 얻게 된 이유다.

 

장 원장은 민주화 운동으로 수차례 투옥됐지만 유공자 신청은 하지 않았다. 장 원장은 “국민 된 도리, 지식인의 도리로서 할 일을 한 것일 뿐이고 대가를 바라고 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라며 배상금도 받지 않았다.

 

정부는 이날 장 원장에 민주주의 발전 공로로 국민훈장을 추서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장 원장은 노동운동과 민주화운동으로 우리 시대를 지키신 진정한 귀감이셨다”라며 “그 뜻을 잊지 않고 기억하겠다”라고 했다. 이어 “고인의 명복을 빌며 유족분들에게 심심한 위로를 전한다”라며 유족에게 애도의 뜻을 표했다고 정혜전 대변인이 전했다. 국민의힘 한지아 수석대변인도 “고인은 우리나라 민주화 운동의 상징”이라며 “투병 중에도 정치로 모두가 행복한 세상 만들지 못하고 떠난다며 오로지 민생만 걱정하신 고인의 뜻을 국민의힘은 끝까지 기억하겠다”라고 했다.

 

장 원장은 정치개혁에 힘써 왔다. 그는 전국구 비례대표제를 폐지하고 현행 1인2투표제(정당명부 비례대표제) 도입에 역할을 했고 대통령선거 기탁금을 5억원에서 3억원으로 낮추는 데 기여했다. 1990년대 중반 신문명정책연구원을 설립했고, 2023년부터는 특권폐지 국민운동본부 상임대표로 활동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조무하씨와 딸 2명이 있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3층에 마련됐다. 발인은 26일 오전 5시다. 장지는 경기 이천 민주화운동기념공원이다.


김현우 기자 with@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