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메뉴 보기 검색

25년차 경찰관의 사람 이야기… “경찰 버스 창밖 풍경이 곧 세상”

늦더위가 기승을 부린 10일, 서울 종로구 한복판에 3.4m 높이의 대형 경찰 버스가 서 있다. 버스 안에서 박승일 경감(49)이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얼굴들을 유심히 살핀다. 

 

오전 6시30분, 출근 시간. 박 경감과 동료들은 경찰 버스에 올라 하루를 시작한다. 그가 속한 경찰관기동대는 서울 200여 곳을 돌아다니며 요구와 갈등이 집약된 집회·시위 현장을 안전하게 지킨다.

 

10일 서울 종로구 일대에 정차한 경찰 버스 앞에서 박승일 경감이 무전기를 들고 서 있다. 이예림 기자

박 경감은 매일 수백 명의 얼굴을 마주한다. 때로는 분노에 찬 얼굴, 때로는 절박함이 묻어나는 얼굴들. 그 모든 표정 뒤에는 저마다의 사연이 숨어있다. 25년 경력의 박 경감은 지구대·파출소를 거치며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지만, 이곳에서 만난 이들은 조금 다르다.

 

“정치적이지 않은 집회·시위도 많아요. 그런 현장에서 만난 사람들의 아픔은 깊이가 달라요.”

 

그러면서 최근 있었던 산업재해 유가족 시위를 떠올렸다. 2시간 넘게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절규를 들으며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아픔이 바로 자신의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박 경감은 “‘이 방법마저도 없으면 저분들은 정말 못 살겠구나’라는 마음이 들곤 한다”고 했다. 

 

집회·시위에 반감 갖는 시민들도 이해한다. 잘못된 방법일 때도 분명 있기 때문이다. 박 경감은 “진짜 문제는 서로의 이야기를 궁금해하지 않는다는 점”이라고 지적한다. 집회·시위 참가자들이 왜 거리에 나왔는지, 어떤 아픔이 있는지 알려고 하지 않는다. 모르니 오해하고 쉽게 욕한다. 

 

박 경감은 길거리에서 꽃을 파는 노사장과 나눈 대화를 들려줬다. 대학 하계 졸업식 지원 근무를 나갔다 우연히 만났다. 새벽부터 공복에 일한다는 말에 김밥을 나눠 먹으며 자연스럽게 이야기의 물꼬를 텄다. 그러다 노사장이 툭 던진 한 마디가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사장님이 ‘요즘 누가 말을 거냐’고 하더라고요. 생각해보면 세상이 정말 많이 변했어요. 우연한 대화는 커녕, 잘 아는 사람들끼리도 깊은 이야기하기 힘든 사회잖아요.”

 

박 경감은 경찰 제복만 입으면 다른 사람이 된다. 더 적극적으로 시민들에게 다가가고 말을 건다. 박 경감은 하루에도 수백 명의 사람들을 만나며 쌓은 이야기들을 글로 풀어낸다. 언론사에 기고하고, 자신의 블로그에서 연재물을 쓴다. 1년에 20권 이상 책을 읽는 그에게, 글쓰기는 또 다른 형태의 소통이다. 

 

“경찰관의 눈으로 본 일상의 이야기를 전하고 싶어요. 거창한 게 아닙니다. 그저 사람 사는 이야기, 그 속에 담긴 희로애락을 있는 그대로 전하고 싶은 거죠.”

 

박 경감이 작업장에서 유화를 그리고 있다. 박 경감은 5년 안에 100점의 초상화로 전시회를 열 계획이다. 

최근 박 경감은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그가 만난 사람들의 얼굴을 유화로 그리는 것이다. 5년 안에 100점의 초상화로 전시회를 열겠다는 계획도 세웠다. 박 경감의 눈빛에서 사람에 대한 끝없는 호기심과 애정이 느껴졌다. 

 

해 질 녘, 박 경감은 다시 버스에 올라 창밖을 바라봤다. 오늘도 수많은 얼굴들이 그의 기억 속에 새겨졌다. 박 경감의 25년 경력은 우리 사회의 희로애락이 담긴 살아있는 기록이었다.


이예림 기자 yeah@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