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침없이 쓴다. 기존의 법칙, 방식, 형식, 틀 등에 얽매이지 않고 쓰는 것이다. 서예가 추구하는 아름다움의 개념을 ‘곱고 예쁘고 정돈된 글씨’에서 ‘거칠고 흩날리고 자유분방한 글씨’까지, 무제한 확장해 나간다. 작품의 구성과 배치도 더 자유로워야 한다고 여긴다.
취석(푸른돌) 송하진은 우리 한글이 주인되는 서예를 펼친다. 600년이 되어가는 한글은 세계적으로도 가장 과학적이자 실용적인 글로 인정받고 있다. 특히 글꼴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따라서 이제는 한글이 당연히 서예의 주인이 될 때가 된 것이라고 본다.
“중국은 한자가 주인되는 중국서예로, 일본은 일본어가 주인되는 일본서예로, 한국은 한글이 주인되는 한국서예로 발전해야 국적이 분명한 서예의 다양성 시대가 열립니다. 그 다양성을 바탕으로 세계화도 이룰 수 있어요. ‘K-서예’의 지름길인 셈이죠. 한글만으로도 서예의 예술성을 충분히 확보할 수 있습니다. 대중성과 한국성 그리고 진정한 세계성을 보여줄 것입니다.”
취석은 필순(筆順)도 바꾸어야 한다고 말한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써가는 것이 아니라 한글의 어순과 필순에 따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써나가야 혼란을 막을 수 있고 특히 젊은 층의 호응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의 느낌과 맛, 분위기도 중요하다. 광개토대왕비나 한글궁체처럼 작품에서 한국성이 우러나와야 진정한 한국서예라고 강조한다. 중국·일본 서예와 확연히 다른 한국성이 무엇이냐에 대한 논쟁과 탐색이 이어질 것이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화이불치검이불루(華而不侈儉而不陋: 아름답지만 사치스럽지 않고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다)와 같은 내용은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그는 서예에 대해 “일회 운필에 의한 추상적 형상으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예술행위”라며 “시간의 흐름 속에 계승되는, 인문학적 의미를 표출하는 문자예술”이라고 정의한다. 서예의 기본정신이다. 하얀 종이 위에 검은 먹으로 글씨를 쓰고 붉은 도장을 찍는 흑백주(黑白朱)의 조화. 하나의 작품을 빚어내기 위해서는 상당 기간 법고(法古), 수련과정을 거쳐 필력을 길러야만 한다고 조언한다.
취석 역시 여느 서예가와 마찬가지로 50대 후반까지는 구양순, 안진경, 동기창, 황산곡, 하소기, 왕탁, 우우임 등 주로 중국 서예를 보고 쓰고 공부했다. 60대에 들어서 서예의 대중성과 한국성, 그리고 세계성을 헤아리다가 추사, 창암, 원교, 소전, 강암, 일중, 남정, 평보를 비롯해 현대 한국 서예가들까지 한층 깊게 파고 들었다. 한국서예의 빼어난 예술성과 무궁한 확장 가능성을 내다본 것이다. 그리고 70을 넘기면서 마침내 그간 탄탄하게 닦아온 ‘거침없이 쓰는 서예’의 길을 열었다.
장준석 한국미술비평연구소 대표는 “특별한 형상미와 조형성을 맛보게 하는 그의 작품은 누구나 쉽게 접근하고 이해할 수 있는 장점을 지녔는데, ‘그림으로 쓰여’ 있기도 하고 ‘글로 그려져’ 있기도 하다”면서 “글자지만 그림이 되어 있고, 어느새 시가 되어 있는, ··· 구수한 큰 맛이 난다”고 호평한 바 있다.
서예가이자 평론가인 심석 김병기는 “손으로 글씨를 쓰는 행위 자체가 사라져 가는 현실 앞에 과감히 자신의 서예를 들고 나온 것”이라며 “취석의 ‘거침없이 쓰는 서예’는 한국서예가 구현해야 할 시대정신이고, 한국 서예를 진흥하는 유력한 대안이며, 후대에게 전통서예를 알리는 효과적인 묘안”이라고 값을 매겼다.
사실 아직도 많은 이들이 송하진에 대해 전주시장과 전북도지사를 지낸 ‘인물’로만 떠올린다. 하지만 취석은 유소년기와 청년기 등 성장하는 내내 서예를 보고 익히며 자랐다. 생활 속에서 서예가 ‘눈에 젖고 귀에 물들어 온’ 목유이염(目濡耳染)의 저력을 가진 서예가다.
그의 조부 유재(裕齋) 송기면(宋基冕) 선생은 서예가이자 “우리 전통을 몸체로 삼되 그 쓰임새는 새로워야 한다”는 구체신용설을 주장한 유학자였고, 부친 강암(剛菴) 송성용(宋成鏞) 선생은 근현대 한국서예를 대표하는 대가였다. 서단에서 활동중인 우산 송하경, 하석 박원규, 산민 이용, 이당 송현숙 등도 강암의 제자들이다.
취석 송하진의 초대전이 서울과 전주에서 연이어 열린다. 25일부터 10월1일까지 서울 종로구 인사동 한국미술관에서, 10월 11일부터 11월 10일까지 전주 완산구 풍남로 현대미술관에서 ‘거침없이 쓴다’는 문패를 내걸고 105점의 작품을 선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