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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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가만난세상] 전 통일부 차관의 ‘손절 행보’

“통일부 꾀돌이로 유명하셨죠. 국회 수준이 높아질 겁니다.”

4월, 22대 국회의원 선거가 끝나고 김기웅 전 통일부 차관이 국민의힘 의원으로 당선됐을 때 통일부 직원의 말이었다. 통일부에선 처음으로 선배가 국회 진출에 성공해 고무된 분위기가 느껴졌다. 부처가 통째로 ‘간첩’ 취급을 받으며 풍비박산이 나고 자존감이 짓밟혔던 탓에 내심 이제 어깨 좀 펴려나 기대할 만하지 싶었다. 통일부 출신 의원이 그간 없었다니 놀랍지만, 보수 정당에서 1호가 나왔단 점도 신선했다. 진보는 영입할 필요가 없다고 여기고 보수는 관심이 없어서였을까 짐작하며, 그의 당선이 나름 의미심장하다 생각했다.

김예진 외교안보부 기자

전설 같은 일화도 회자됐다. 탈냉전과 북방외교 바탕 위에 남북교류가 꽃피던 시기 직장을 다닌 그는, 숱한 실무회담에 참여해 ‘회담통’이라는 명예로운 수식어를 달고 살았다. 그런 그가 2015년 남북 비공개회담 중 북측 당국자를 상대로 잘 싸우자 회담을 모니터링하던 박근혜 대통령이 칭찬하며 청와대로 불러들였다는 이야기다.

7월, 22대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첫 질의. 그는 PPT 슬라이드를 띄웠다. ‘1971∼2014년, 남북회담 667, 합의문 258’. “7·4공동성명(1972), 판문점선언(2018), 남북기본합의서(1991) 내용 다 똑같습니다. 같은 합의를 50년째 되풀이하고 있어요. 그 수치가 668, 259가 된들 뭣이 달라지겠습니까.”

차관 시절 만난 그가 회담무용론자, 협상비관론자였던 걸 기억한다. 그러나 통일부 출신 의원으로서 첫 질의로 역대 합의서가 “다 똑같다”고 비약할 줄은 몰랐다. 합의문은 이전 합의의 유효함을 재확인해 나가는 역사성이 있고 통일방안 틀 안에서 만들어지기 때문에 유사함을 모를 리 없는 그가, 과거 대화 시기 남북 접촉지대 증가에 따른 파생효과와 대북정보 증가, 위기관리를 통한 경제효과, 외교적 지위 상승, 민족 이질화 지연, 북핵·미사일 개발 속도 저하 등의 효과를 알고도 남을 그가 그런 1차원적 주장을 할 줄은 예상치 못했다.

8월, 국민의힘 연구모임 ‘북한 그리고 통일’ 행사 때 연단에 오른 그는 이렇게 자신을 소개했다. “외교부에 있다가 1989년에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지는 걸 보면서 통일부에 몸을 던졌습니다. 사실은 금방 될 줄 알구요.” 그에 관한 인사 기사, 공식 블로그 프로필 어디에도 그가 외교부 출신이란 사실은 없다. 그는 서울대 외교학과에서 학·석사 후 통일부에서 5급부터 차관까지 32년을 보냈다. 통일부 한 직원이 “아마 석사 후에 외교안보연구소인가에 연구원으로 있다가 특채로 들어왔다고 들은 것 같다”기에 그런가 보다 했다.

일련의 목격이 잊히지 않는 건, 통일부의 처량한 신세 때문이다. 그의 자기소개에 대해 통일부 사람들은 “외교부엔 인사교류로 1년만 계셨죠”라며 반박하거나, “진짜 그렇게 말했냐”고 믿기 어려워했다. 조직에서 “예쁨만 받았고”, “서울대 선배들이 꽃길만 걷게 한 사람”이라며 배신감을 넘어 허탈해했다. “통일부가 대북지원부냐”는 윤석열 대통령 질타 후 통일부는 “조직 망가진다”는 원로들의 걱정을 뒤로하고 반공·혐북심리전 선봉에 섰다. 본업 대신 부업들로 엔(N)잡러가 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1년을 보냈다. 그러나 전직 차관의 손절 행보를 보면, 통일부 잘한다고 알아주는 곳이 있을까 싶다.


김예진 외교안보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