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추석은 평생 잊지 못할 것 같다. 이례적 폭염 때문이다. 추석 사흘 전 성묘를 갔다가 32도가 넘는 불볕더위와 높은 습도 탓에 애를 먹었다. 준비해 간 음식을 놓고 차례를 지내는데 땀이 비 오듯이 흘렀다. 산소 주위에 모여앉아 고인과의 추억을 되새기는 건 엄두도 못 냈다. 현기증이 나 서둘러 그늘로 자리를 옮겨야 했다. “내년에는 추석 이후에 성묘해야겠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추석 연휴 마지막 날까지 폭염경보가 발령됐다.
올해 무더위는 뜨겁고 지독했다. 역사상 가장 긴 열대야가 이어져 에어컨 없이는 잠을 이루기 힘들었다. 평균기온, 열대야 등 각종 더위 지표는 ‘최악의 여름’으로 꼽히는 1994년과 2018년을 넘어섰다. 행정안전부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에 따르면 올해 여름철 온열질환자가 3683명 발생했고, 이 중 34명이 목숨을 잃었다. 지난해 온열질환자는 2818명이었다. 누구나 기후위기의 심각성을 실감했을 것이다.
문제는 이런 일이 올해로 그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기후변화는 기후위기, 기후재앙으로 악화일로로 치닫고 있다. 오죽하면 기상학자들이 “올해가 가장 시원한 여름일 것”이란 말을 하겠나.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지난해 열린 유엔식량농업기구 정상회의에서 “지구온난화(Global Warming) 시대가 끝나고 끓는 지구(Global Boiling)의 시대가 시작됐다”고 선언했다.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패널(IPCC)’은 “적어도 2025년부터는 온실가스 배출량이 감소해야 한다. 안 그러면 기후위기를 피할 기회를 영영 놓칠 것”이라고 했다. 섬뜩한 경고가 아닐 수 없다.
사정이 이런데도 정부의 대응은 미흡하고 더디다. 우리나라의 이산화탄소 배출량은 세계 10위, 1인당 배출량은 세계 최상위권이다. 국제 평가기관 저먼워치 등이 최근 발표한 기후변화대응지수(CCPI)에 따르면, 한국은 지난해보다 4순위 하락한 64위(전체 67개국)를 기록했다. 현 정부의 연평균 탄소 감축 목표는 윤석열 대통령 임기인 2027년까지 1.9%에 불과하다. 그러면서 2028~2030년 각 9.3%씩 감축하겠다고 차기 정부로 떠넘겼다. 기후대응기금으로 얼마나 쓰는지 집계도 못 하는 현실이다. 국제 환경단체들로부터 ‘기후 악당 국가’라는 비판이 끊이지 않는 이유다.
국회도 구호만 외칠 뿐 이렇다 할 진전이 없다. 우원식 국회의장은 22대 국회 개원식에서 “국회 기후위기 특별위원회에 법안심사권과 예결산심의권을 부여해 실질적 변화를 이끌자”며 ‘기후국회’를 표방했다. 여야 원내대표들도 기후특위 설치에 긍정적인 입장을 내놨다. 하지만 개원 5개월이 지났는데도 우선순위에서 밀리고 실질적인 협의가 이뤄지지 않아 첫발도 떼지 못하고 있다. 여야가 이견이 없는데도 기후특위를 구성하지 못하는 건 절박성이 부족해서다.
유럽연합(EU)은 2050년까지 탄소 배출을 ‘제로’로 만든다는 어젠다에 발맞춰 행정부 내에 기후 전담부처를 신설해 대응하고 있다. 독일은 2021년 기후와 에너지, 산업을 포괄하는 ‘경제기후부’를 신설했고, 이탈리아도 같은 해 에너지정책과 환경 업무를 통합한 ‘생태전환부’를 설치했다. 반면 우리는 기후위기, 탄소 중립 실현을 환경부, 산업통상자원부 등 각 부처가 따로 대응해 컨트롤타워 역할이 모호하다. 에너지와 기후를 총괄하는 ‘전담부처’ 신설 또는 확대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정부의 의지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극한기후는 이제 뉴노멀이 됐다. 탄소 배출량을 줄이고 신재생에너지 비중을 늘리는 것은 선택이 아닌 필수다. 스웨덴의 유명한 기후활동가 그레타 툰베리는 기후위기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기성세대를 향해 “어른이 아이들의 미래를 빼앗고 있다”고 비판했다. 구테흐스 사무총장은 “우리는 여전히 최악의 기후재앙을 피할 수 있지만, 이는 우리가 전 지구 온도 상승폭을 1.5도로 제한하고, 기후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필요한 목표를 가지고 지금 행동할 때만 가능하다”고 했다. 정부, 국회, 산업계, 국민 모두 각성하고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한다.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